사랑하는 할머니!
오늘 정릉에 가서 김치를 가져왔습니다. 도고 햅쌀 한 자루에 찹쌀도 두 말쯤이요. 도고 배추로 담근 김치, 보쌈김치, 총각무 김치들을 차 가득이 싣고 가슴까지 따뜻한 부자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아래층 안방에서 우리 오는 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시던 할머니는, 어두워서 나는 안보이지만 할머닌 내가 보이겠지하고 웃어보이기까지 한 제가 후다닥 신발 벗어던지고 닫힌 안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얼른 동창 쪽으로 놓인 할머니 사진 속으로 들어가 버리셨지요.
방학이 시작되어 온갖 짐을 싸들고 할머니께 가면 우린 언제나 공주와 왕자가 될 수 있었지요. 그것은 맛있는 음식과 시설 잘된 할머니 집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만 사시는 것 같은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할머니! 왕복 십 여리나 되는 도고장까지 우겨우겨 따라갔다 돌아오는 길엔 영락없이 업혀오곤 했던 제가 밉지도 않으셨나요. 우리 여수! 에이그, 이 산짓골 여수! 하시며 귀여워 해주시고, 니가 복동이라 쌍둥이 남동생 봤다며 사랑해 주신 할머니! 그 때 사주셨던 나비같이 가벼웠던 진분홍 나일론 치마를 입고 팔랑팔랑 춤추며 할머니 손잡고 다시 장에 가고 싶어요.
큰일 있을 때마다 다니러 오셔서 저를 안고 업고 귀여워해 주시던 일가의 통미할머니가 가시고 나면, 석란이 넌 통미할머니가 나보담은 훨씬 좋지?하고 물으셨죠. 다 아시면서 왜 물어 보셨나요? 아니야, 난 할머니가 제일 좋아!란 말이 그리 좋으셨어요?
거친 농촌 일로 수세미 같던 할머니 손으로 쓱쓱 두어 번만 등을 문질러 주시면 저는 쿨쿨 잠이 들곤 했지요. 겨울밤 책을 읽다 배가 고파질 때쯤이면 소리없이 일어나 다락 자물쇠 열고서, 얼음든 감도 내다주시고, 또 어떤 땐 수저 듬뿍 엿도 퍼다주시고 살얼음 싹싹 씹히는 감주도 챙겨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제가 결혼할 때 우리 유학 갈거라고 말씀드리니, 나는 부자 사위도 싫고 박사 사위도 싫더라. 느이 아버지 느이 삼춘 너무 오래 기다려서 기다리는 건 진력났어. 암것 몰라도 옆에서 같이 살어야 좋지 하셨죠. 어서 박사되어 돌아오면 기뻐해 주시리라 생각했었는데.... 11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할머닌 제 딸 꽃방실을 보고 석란이지? 하시고 제가 석란이에요. 얘는 제 큰딸이고요 하면 에이 그런 그짓말이 어딨어. 우리 석란인 쪼그만 앤디. 이런 늙은 사람이 아니구 하셨지요.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화가 단단히 나신거죠? 나중엔 이 늙은 여우가 옛날 인절미가 시집을 간다 노래도 잘 부르던 할머니의 귀여운 여운지 알아보셨조? 일부러 내 옆에서 자구난 양반 이불두 안개구 어디갔댜? 하신거죠?
기차가 도고역을 향해 달릴 때 어디 만큼 가면 벌써 저기 수리조합둑이랑 우리집 다리랑 우리 뒷산이 보였지요. 그리고 그 다리 위에, 하얀 수건을 쓰신 작고 귀여운 우리 할머니가 아마도 그제서야 처음으로 허리를 뒤로 펴시고 머리 수건을 다시 매시고 기차 오는 쪽을 바라보고 계셨죠. 기차간에 우리가 보였어요? 안 보이셔도 거기 서 계셨죠. 우리가 할머닐 볼 수 있게요.
김치를 가지고 쌀을 싣고 돌아오면서, 좋은 배추 좋은 무 한 트럭을 꾹꾹 쟁여 서울로 보내시고 당신 드실 고추가룬 하나도 남기지 않으셔서 다듬고 남은 무청에 소금만 넣고 담그신 허연 김치를 잡수시던 할머니 생각에, 앞마당에 단비를 안고 우두커니 서 있었죠. 할머니! 천국에선 알아 보세요? 얘가 제 셋째 딸 단비예요. 꽃방실과 다솜이 낳고 8년 뒤에 또 낳은 셋째예요. 어여가, 어여 가. 우리 석란이 아들 하나 낳아얄텐디.... 할머니도 들어가세요. 곧 또 올게요.
할머니! 이번에 제가 독일 가서 11년 동안 살면서 엄마 아빠께 보낸 편지들 중 처음 83년부터 85년에 쓴 것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요. 첫번째 책은 할머니께 드리러 도고에 갈게요.
사랑해요. 할머니! 천국에선 허리도 쭈욱 펴시고 다리도 쭈욱 펴시고 아픈 데 없이 행복하시죠? 고맙습니다. 김치랑 쌀이랑 다 잘 먹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