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조선 국왕 영조 문학 연구
저 자 안장리
발행일 2020-05-28
판 형 신A5
ISBN 9788984119444
페이지수 392
정 가 29,000




영조는 만년에 자주 글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반추하곤 하였다. 즉위 이전에는 탈속한 세계를 추구하는 경치 관련 시를 주로 썼으며, 즉위 이후에는 자신이 삼종혈맥을 잇는 정통 후계임을 주장하고 조종성덕을 칭송하였다.
국가의 성패가 인재 선발에 있음을 알고 과거 관련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 숙종이 세운 대보단에 신종황제 외에 명나라 태조와 의종을 새롭게 향사하고 존주대의와 대명의리를 읊었다. 군신 간의 교유에서도 수많은 갱진시를 지어 국정에 대한 정서를 공유하였으며, 신하들에게 자주 시문을 하사하여 유대를 돈독히 하려 하였다.
영조는 가족에 대한 글도 많이 지었는데 제문을 특히 많이 지었다. 국왕이 된 이후에도 격이 달라 제사도 못 지내고 어머니라 부르지도 못하던 숙빈 최씨에 대해 지속적인 추승을 추진하여 결국에는 어머니의 묘를 ‘소령원’으로, 혼전을 ‘육상궁’으로 승격시켜 공식적으로 제사 지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어머니에 대한 호칭의 변화가 숙빈 최씨 치제문에 남아 있다.
자신이 아끼던 후궁과 자식들에 대한 제문에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비통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더욱 비통한 일은 사도세자와 관련된 글들을 폐기하거나 간행하지 못하게 하고 이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금기시한 것이다.
책을 펴내며

제1장 여는 말
1. 들어가기
2. 선행 연구 및 연구 방법

제2장 영조어제 현황
1. 『어제집경당편집』
2. 『어제속집경당편집』
3. 『영종대왕어제속편』
4. 『영종대왕어제』
5. 『어제시문』
6. 『영종대왕어제습유』
7. 『열성어제』
8. 영조어제간본
9. 영조어제첩본
10. 영조어제의 편찬 및 간행, 보존
1) 어제편차인
2) 간행
3) 보존
11. 소결

제3장 영조어제의 내용
1. 영조의 생애
1) 영조가 회고하는 일생
2) 행장을 통해 본 일생
2. 즉위 이전의 집필
3. 국정과 집필
1) 조종성덕과 삼종혈맥
2) 국태민안
3) 인재 선발
4) 도성 방위
5) 대외인식
6) 군신 간의 교유
⑴ 국사에 대한 정서 공유
⑵ 신하에 대한 치하 및 격려
4. 궁궐과 주변 경물
1) 탄생당
2) 억석와
3) 구저
4) 추모당
5) 정와당 · 종용당
6) 기타 건물
7) 주변 경물
5. 가족애
1) 생모 숙빈 최씨
2) 모후 인원왕후
3) 장남 효장세자
4) 차남 사도세자
5) 정빈 이씨, 화억옹주, 의소세손
⑴ 정빈 이씨
⑵ 화억옹주
⑶ 의소세손
6. 노왕
1) 강개 회포
2) 편작과 건공탕
7. 3대 국정 사업
1) 탕평
2) 균역
3) 준천
8. 소결

제4장 영조어제의 형식
1. 영조체
2. 훈유문
3. 문답체
4. 소결

제5장 영조어제 교감
1. 『어제시문』 상책과 『열성어제』 비교
1) 시 전체를 삭제한 경우
2) 글자나 어휘를 고친 경우
3) 글자의 순서만 바꾼 경우
4) 상통하는 글자로 바꾼 경우
5) 두 가지 이상이 복합된 경우
6) 본문 이외의 내용을 고친 경우
2. 영조어제첩본과 문집 비교
3. 「감회 10수」
4. 소결

제6장 건륭어제와의 비교
1. 건륭제
2. 청나라의 어제 편찬 양상과 건륭어제
3. 건륭어제의 내용
1) 국왕
2) 왕족
⑴ 왕실과 주변 경물
⑵ 가족애
3) 건륭어제의 특징
⑴ 명승 가영과 상투구의 반복
⑵ 의례적 창작과 ‘건륭체’
4. 소결

제7장 맺는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안 장 리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논문은 「한국팔경시연구」이다. 천안 호서대학교 겸임교원을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도서관 관장 및 포은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한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한국 전통 경관 문학, 조선 왕실 문학, 포은 정몽주 문학 관련 다수 논저를 저술하였다. 주요 논저로는 『10가지 주제로 풀어본 우리 경관 우리 문학』, 『한국의 팔경문학』, 『영조어제 해제』 4, 『조선왕실의 팔경문학』, 『장서각 소장 《열성어제》 연구』, 「영조어제첩본 율문의 종류와 주제」, 「영조 궁궐인식의 특징」, 「영조어제의 봉모당 소장 양상 고찰」, 「한국과 베트남의 중국팔경 수용 양상 고찰」, 「동문선의 선문의식에 나타난 문학의 개념과 가치」,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장르변형 글쓰기」, 「권근이 추구한 유교국가의 국왕상 고찰」, 「정몽주의 시호 ‘문충’에 대하여」 등이 있다.
문학군주 영조, 8,700여 편의 시문을 짓다
조선의 제21대 국왕 영조는 흔히 정조와 엮여 영·정조 시대라고 불리며, 조선의 중흥을 이끈 왕으로 평가받는다. ‘영조’ 하면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탕평책’ 아니면 그의 아들 ‘사도세자’일 것이다. 이처럼 영조의 정치적 업적이나 사도세자의 죽음 같은 비극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나, 문학군주로서의 영조의 모습은 기실 알려지지 않았다. 8,700여 편이라는 상당한 수의 문과 시를 창작한 군주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참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가 이런 저술을 통해서 ‘간본의 정치’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시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00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영조어제를 해제하면서 영조의 문학을 처음 접한 저자는 당시 영조의 문체를 보고 당황했다고 한다. 저자는 영조어제를 깊이 연구한 끝에 영조가 만년에 이런 시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으며, 국왕 영조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조의 문학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국왕이기 이전인 연잉군 시절부터 많은 시문을 지었던 문학가 영조를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말일지 모른다. 또 국왕이 된 그가 자신과 타인에게 훈계하는 문학을 주로 썼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시문은 곧 영조가 꿈꾸는 정치와 사회의 이상을 말해 주기에, 그것은 영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조가 그의 문학에서 자신의 3대 국정사업으로 탕평과 균역, 준천을 꼽았다는 사실은 그가 탕평책과 균역법, 준천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이 곧 국왕 영조의 정책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또 영조가 자신의 생애에서 어떤 사건들을 가장 중요시했는지 살펴본다면 그의 행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보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에서는 알 수 없었던 국왕 영조의 모습도 그가 지은 시문에서는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영조를 이해하는 데 그의 시문이 중요하다면, 조선의 다른 국왕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들의 어제가 중요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영조어제간본, 영조어제첩본을 비롯하여 열성어제와 문집에 실린 문과 시 등을 총망라함으로써 영조어제의 전모를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영조어제의 형식과 내용을 분석할 뿐 아니라, 문집과 어제를 교감하고 건륭제와의 비교를 통해 국왕 영조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은 이후 조선 국왕의 문학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위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이 문장은 아마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문장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 홍길동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호부호형을 허하라”라는 말도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 한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왕실의 가족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설움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 왕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다고 하더라도, 홍길동의 설움을 떠올리면서 공감하는 이는 적을 것이다. 그런데 영조가 서얼들에게 호부호형을 허하고 이를 어긴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윤음을 내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준다. ‘역률’이라니.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영조는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과연 왜 영조는 이러한 윤음을 내렸을까?
그것은 영조가 국왕으로서 미천한 어머니를 감히 어머니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는 미천한 신분이었고, 희빈 장씨의 사건으로 인해 숙종은 후궁을 정비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명문화했기에, 국왕이 되기 위해 영조의 어머니는 생모가 아닌 모후 인원왕후가 되어야 했고, 영조는 인원왕후를 어머니라 불러야 했다. 물론 영조는 모후 인원왕후의 은혜에 감사해했고 어머니로서 대우했지만, 그에게는 항상 생모인 숙빈 최씨가 눈에 밟혔다. 결국, 영조는 꾸준한 추숭을 통해 묘소를 소령원으로, 혼전을 육상궁으로 격상시켰고, 국왕으로서 미천한 어머니의 묘에 절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국왕 또한 누군가의 아들이란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면서 세손 정조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먼저 떠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영조는 사도세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국왕으로서 영조의 선택을 생각하기 전에 부모로서 자신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영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또 장수한 왕으로서 사랑했던 여인과 첫 딸, 어린 손주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가장 영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장수했던 왕으로서 영조의 가족애는 그가 남긴 시문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정빈 이씨를 향해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였지만 그 뜻은 곧 벗이었으니 내 마음을 아는 이는 그대였고 그대의 마음을 아는 이는 나였”다고 이야기하며 “울음소리 삼키며 크게 슬퍼하니 흐르는 샘물 같은 눈물을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슬픔을 머금고 글을 지으니 목이 메어 차마 완성할 수 없고 촛불 아래 붓을 적시지만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겠다고 한다.
요절한 장남 효장세자를 향해서는 “대저 죽음에 미쳐 내가 얼굴을 마주하고 불러서 나를 알아볼 수 있느냐 하니 힘없는 소리로 응답하며 눈의 눈물이 뺨”을 적셨다고 묘사하면서 효장세자의 생애를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음을 연보를 통해 알리고,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국왕으로서 왕의 자질을 가진 자식의 죽음이기에 슬퍼한다며 자신의 슬픔을 공식화했다. “더욱 애통한 것은 세자의 기일이 정빈 이씨의 기일과 같기 때문”이라는 그의 글에서 그 슬픔이 보인다.
딸인 화억옹주를 향해서는 “무술년 8월 아무 날 아버지 연잉군은 눈물을 뿌리며 쓴다”고 하였고 손주인 의소세손을 향해서는 “임신년 3월 초4일 묘시에 통명전에서 훙서하니 나이 겨우 세 살이다. 여기까지 쓰자니 나도 모르게 붓을 던지고 통곡하게” 된다며, “별빛 같은 눈망울과 또랑또랑한 음성을 어디에서 다시 보고 들을 것인가?”라고 하여 어린 나이에 떠나간 딸과 손주에 대한 슬픔을 읊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죽인 차남 사도세자를 향해서는 “내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관련된 글을 모두 없애라고 명했다. 많은 시문을 지었던 문학군주 영조가 글을 모두 삭제하라고 했다는 점에서 그의 슬픔은 말조차 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영조의 시문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군주로서 영조의 모습뿐 아니라, 남편 그리고 아버지로서 영조의 모습 또한 만날 수 있다.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작품에는 시대와 국가, 궁궐과 제도, 왕실과 친족 등에 대한 국왕의 진솔한 소회가 풍부하게 담겨 있으므로 본 연구는 당쟁의 폐해와 사회모순이 격화된 시기로 평가되던 당시, 국가 전 분야의 개혁을 시도한 영조와 그의 시대에 대한 이해에 기여할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숙종, 정조, 고종 등 국왕 저작 연구의 초석이 될 것이다. _14쪽

영조어제의 편찬과 간행은 주로 생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어제 편찬을 전담하는 어제편차인을 두고 수시로 작품의 첨삭과 편찬을 진행하였으며, 먼저 영조어제 13책본을 만든 뒤 이를 산삭하여 20권 10책의 『열성어제』로 편찬한다. 이후의 글은 ‘속편’으로 편찬하되 『열성어제』에 첨부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는데 이는 아버지인 숙종보다 많은 분량을 쓰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_55쪽

영조는 또한 자신의 글이 한자를 모르는 백성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 영조어제에는 다른 국왕의 어제에 비해 언해가 많은데 이 언해의 편찬에도 어제편차인이 깊이 관여하였던 듯하다. 영조는 언해가 쉽기는 하지만 대개 소홀히 하기 때문에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_94쪽

영조가 신하에게 시를 내린 경우는 국가적 공을 세운 공신, 대대로 벼슬을 한 세신과 원로 그리고 종친 등에게 내린 경우도 있지만 새로 급제한 신진을 축하하는 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먼저 국가적 공을 세운 공신에게 내린 시로 영조는 무신란을 평정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임명하는 한편 역대 공신들과의 회맹을 통해 이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일련의 시로 읊었다 _142쪽

조선은 군주제 국가였고 왕자로 살던 영조에게 국왕의 존재는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아버지 숙종과 이복형 경종은 가족이면서 군림하는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영조의 대내외적 환경은 이처럼 독단적인 아버지 숙종과 정파적으로 대립하는 이복형 경종이 이끌던 상황이었으므로 매우 살얼음판 같은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입장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_188-189쪽

이 글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인정하고 정조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강서원에 머물면서 세손을 통해 4백 년 종사를 이어갈 생각을 굳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영조는 임오화변 관련된 글을 모두 없애라 하여 직접적인 관련 글들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글들은 당시 영조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_215쪽

1773년 8월 광통교에 거둥한 영조는 준천공사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포상하고 「어제준천명병소서」(K4-4501)를 지었는데 내용은 준천의 성과를 찬미하고 세손과 신하들에게 이를 명심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아울러 이 글에서는 준천뿐 아니라 탕평과 균역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처럼 영조에게 탕평, 균역, 준천 등 3대 사업은 늘 자신의 대표적인 필생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_247쪽

영조는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고 이의 창작을 통해 노년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장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영조의 이러한 독특한 문체는 영조의 특별한 신분과 문학성의 한계로 문학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나 노년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새로운
문체 개발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노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이 시대에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_290-291쪽

『어제시문』과 『열성어제』를 비교하면 『어제시문』의 시 전체가 산삭된 경우, 글자나 어휘를 고친 경우, 오자를 고친 경우, 글자의 순서만 바꾼 경우, 상통하는 글자로 바꾼 경우, 위의 여러 가지가 복합된 경우, 기타 제목을 고치거나 시의 서문을 축약한 경우 등이 보이는데 대개 문을 간략 명료화하거나 시의 격조를 높이기 위한 수정으로 보여진다. _325쪽

영조와 건륭제는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였으며, 자신이 보고 느낀 점을 표현하는데 만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영조는 이런 어제체 이 외에 다양한 반복 방식이 있는 3언체 및 4언체 율문을 즐겨 썼으며, 산문에 있어서도 왕의 뜻을 표현하는 비망기를 기존 글쓰기와 달리 자유롭게 변형시켜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글쓰기를 선호하였다는 점, 특히 만년의 글쓰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 건륭어제와 다른 점이다. _353쪽

영조어제 대부분은 감탄과 반복을 기조로 하며 훈유의 내용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서 만년의 넋두리로 치부되어 문학적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영조의 이러한 독특한 문체는 영조의 특별한 신분과 일생 그리고 오랜 노년에서 비롯된 새로운 문학 형식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문학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_3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