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조선왕실의 안태의례
저 자 윤진영
발행일 2020-06-30
판 형 변신A5
ISBN 9788984119512
페이지수 340
정 가 23,000




조선왕실 자녀들의 탯줄을 간수하는
특별한 의례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왕실에서는 신생 왕자녀의 태를 전국의 길지에 묻는 안태의 전통이 일찍부터 시행되었다. 안태는 왕실 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 왕권의 안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례였다.
안태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실행된 왕실의 주요 의례였으며, 그 결과로 만들어진 태실이 전국의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관련된 수많은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헌기록은 신생아의 태를 간수하는 조선왕실만의 특별한 의례를 들여다보고 왕실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조망할 수 있는 주제이다.
지금까지 안태의례는 전국에 산재한 일부 태실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의 성과로 주목되어 왔다. 앞으로는 왕실에서 시행된 안태의 과정과 가봉 및 수개의 절차에 관해서도 다양한 문헌기록을 토대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태와 태실의 조성은 조선왕조의 번영을 꿈꾸며 오백 년간 지속된 왕실의례의 주요 영역이자 유산이기 때문이다.
머리말 · 5

제1장 서 론
1. 연구 현황 · 17
2. 연구 방향 · 22

제2장 조선왕실의 안태의례
1. 안태의 기원과 전통 · 28
1) 안태의 기원 · 28
2) 안태의 전통 · 32
2. 안태의 기록과 절차 · 38
1) 안태의 기록과 개요 · 38
2) 안태의 절차 · 49
3. 안태의례의 변천 · 64
1) 조선 전기의 안태 · 64
2) 조선 중기의 안태 · 77
3) 조선 후기의 안태 · 83
4. 안태 관련 등록 및 의궤의 검토 · 106
1) 의궤의 구성과 내용 · 106
2) 정조 대의 안태등록 · 108
3) 순조 대의 안태등록 · 116
4) 철종·고종 대의 안태등록 · 122

제3장 조선왕실의 태실가봉
1. 조선왕조 태실가봉의 전통 · 135
1) 태실가봉의 기록 · 137
2) 태실가봉의 형식 · 143
2. 『태봉등록』과 태실가봉 · 147
1) 현종태실의 가봉 · 149
2) 숙종·경종태실의 가봉 · 154
3) 영조태실의 가봉 · 158
4) 경모궁태실의 가봉 · 160
3. 조선 후기 의궤를 통해 본 태실가봉 · 166
1) 태실가봉의궤의 사례 · 167
2) 태실가봉의궤의 내용과 특징 · 171
4. 가봉태실을 그린 도형: 태봉도 · 195
1) 태실 관련 그림과 〈순종태실도〉 · 195
2) 장서각 소장 태봉도의 내용과 특징 · 203
3) 태봉도의 도상적 특징 · 218
4) 태실비 탁본과 가봉의궤의 도설 · 229

제4장 조선왕실의 태실수개
1. 태실수개의 현황 · 239
2. 『태봉등록』의 태실수개 관련 기록 · 246
1) 인조·현종 연간의 태실수개 · 246
2) 숙종 연간의 태실수개 · 249
3) 영조 연간의 태실수개 · 260
4) 숙종·영조 연간 태실수개의 특징 · 272
3. 조선 후기 태실수개 관련 의궤의 검토 · 283
1) 18세기 태실수개 관련 의궤 · 283
2) 19세기 태실수개 관련 의궤 · 292
4. 일제강점기 태실의 변동 · 305
1) 1928년 언론보도로 본 태실 · 305
2) 장서각 소장 『태봉』의 기록 · 308
3) 『태봉』의 기록을 통해 본 서삼릉태실의 조성 · 312

제5장 결 론 · 321

참고문헌 · 331
찾아보기 · 337
윤 진 영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미술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일했고 한국민화학회 학회장을 지냈다. 서울특별시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사전편찬부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조선 궁궐의 그림』, 『왕의 화가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이상 공저), 『조선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등이 있다.
왕실 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
왕권의 안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태어난 왕자녀의 태를 전국의 명산과 길지에 묻었다. 이것을 ‘안태(安胎)’라 부른다. 이는 조선왕조 오백 년간 이어져 온 오랜 관행이자 전통이었다. 태는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자 상징으로 간주되어 소중히 다루어졌다. 왕실의 안태는 왕권의 안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공식적인 의례로서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고, 안태 이후 조성된 태실의 관리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러한 모든 의례와 역사에서는 매번 그 과정과 절차, 소용된 인력과 물력 등의 내역을 빠짐없이 의궤나 등록 자료로 남겨 두었다. 현재 조선 후기에 작성된 자료들 가운데 일부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연구가 미진했던 안태문화의 실체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구체적인 문헌기록을 토대로 궁중의 안태를 다각적으로 조명하였고, 표면적인 이해를 넘어 안태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과 사고의 틀을 제시하였다.


조선왕실의 생명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문화 자원으로서의 태실


그동안 전국에 산재한 태실은 보존해야 할 문화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주목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다. 앞서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는 이왕직(李王職)에서 전국의 태실을 통합하여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태항아리와 지석을 봉출하여 서삼릉으로 옮기는 일이 자행되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훼손된 태실 유적을 체계적으로 돌보고 복원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태실 유적은 단순한 석물이 아닌, 조선왕실의 생명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문화 자원으로서 소중한 인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안태의례는 비공식적인 왕실의 관행으로 이해되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조 오백 년간 이루어진 안태의 과정은 왕실 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 왕조의 번영을 담보한다는 믿음 아래 꾸준히 실행되었다. 또한 왕실의 권위를 반영하면서도 민생에 대한 배려와 효율적인 제도의 운영을 이루려는 개선 과정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영·정조 연간을 거치며 안태문화는 보다 현실적인 의례로 변모하면서 왕실의례로서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곧, 현재 태실 유적에는 오래된 석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실과 관련하여 국가와 왕실의 보전을 위해 노력한 장구한 세월과, 그것을 일구어 온 정신사의 일면도 함께 깃들어 있는 것이다. 태실이 안전하게 보존되고, 전문적인 연구가 진전되어 태실문화가 우리 문화유산을 향한 자긍심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선왕실의 안태의례』의 구성

제1장 ‘서론’에서는 안태의례의 연구현황을 살피고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세부 문헌사료를 통해 안태의 영역을 검토하였다. 제2장 ‘조선왕실의 안태의례’에서는 안태의 기원과 전통, 안태의 기록과 절차, 안태의례의 변천 등을 나누어 살펴보았다. 안태의례의 구체적인 변천 과정을 관련 등록과 의궤의 개별 기록을 통해 귀납적으로 추론하였다. 제3장 ‘조선왕실의 태실가봉’에서는 국왕의 태실에 석물을 설치하는 가봉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가봉은 최초의 태실을 만드는 안태에 이은 후속 절차로서 국왕태실에 위용을 갖추기 위해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태봉등록』과 조선 후기 의궤, 가봉태실을 그린 도형인 〈태봉도〉 등을 통해 검토하였다.

제4장 ‘조선왕실의 태실수개’에서는 태실의 보수에 해당하는 수개에 관한 주요 사실들을 고찰하였다. 수개는 국왕태실의 안태와 가봉에 이어 치러진 것으로 석물의 보수를 뜻한다. 태실수개의 현황을 살피고 『태봉등록』의 태실수개 관련 기록, 조선 후기 태실수개 관련 의궤를 검토하였다. 더불어 장서각 소장 『태봉』의 기록을 통해 일제강점기 서삼릉태실의 조성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제5장 ‘결론’에서는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하였다.
안태의례의 목적은 왕실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생명을 축복하고 장생을 기원하며, 이를 통해 왕실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데 있었다. 그 이면에는 신생아의 태가 국가의 미래와 왕실의 운명을 좌우하는 영물(靈物)이라는 인식이 자리했다. 따라서 왕실 자녀들의 탯줄을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극도의 정성을 기울여 예우하고자 했다. _5쪽

조선 초에는 태조, 정종, 태조, 세종 등 왕의 태실만 조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주로 왕이나 세자의 태실만을 조성하던 고려시대의 전통을 조선 초에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선석산 태실은 세종 때 처음으로 왕자들의 태실을 만들기 시작하였음을 드러낸다. 즉 15세기 전반 세종 때부터는 안태의 범위가 모든 왕자들로 넓어져 왕실의 태실제도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_73쪽

영조의 동강동태론 조치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재위 30년 동안 겪어 온 안태의 관행에 대한 오랜 고심이 있었기에 현실적인 개선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세종과 세조의 훌륭한 선례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볼 때도 더욱 명분이 서는 일이었다. 따라서 영조의 개선안은 이후의 안태에 매우 강도 높은 원칙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비효율적인 관행을 고치고 백성과 관리들의 고충을 줄이고자 한 영조의 결단은 민생을 가장 상위 개념에 두고자 한 생각과 노력의 결과였다. _90쪽

태실의 가봉(加封)은 안태에 이은 후속 의례로서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른 경우에 시행되었다. 최초의 태를 묻은 태실에 국왕태실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석물을 배설하였는데, 이를 가봉이라 한다. 현존하는 국왕의 태실은 대부분 석물로 단장한 상태이지만, 최초에 가봉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_133쪽

태실을 만들고 가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훼손된 태실을 살피고 보수하는 일 또한 조정에서 즉각 조치를 취해야 할 사안이었다. 특히 지방관들은 태실에 생긴 조그마한 흠집 하나라도 왕실에 바로 보고해야 했기에 태실을 면밀히 살폈다. 지방관의 보고는 해당 관청과 왕에게 바로 전달되었고, 왕과 대신들의 검토와 결정에 따라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특별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항상 선례의 기록을 참고하여 판단하였다. _239쪽

조선시대에 전국의 명산과 길지를 골라 조성한 태실은 20세기 초 급격한 변동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이왕직에서 전국의 태실을 통합하여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태항아리와 지석을 봉출하여 서울로 옮기고, 석물은 그대로 방치하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봉출한 태항아리와 지석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38번지 일대에 조성한 서삼릉으로 옮겨 조악하게 만든 터에 안치되었다. _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