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세창프레너미 007]
사르트르 vs 카뮈
저 자 변광배
발행일 2020-12-18
판 형 변신A5판
ISBN 9788984119932
페이지수 256
정 가 15,000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작가, 참여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사르트르와 카뮈는 흔히 ‘실존주의’라는 항목 아래 항상 같이 묶여 거론되곤 한다. 8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밀했던 두 사람은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두 사람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만다. 지난 세기에 그들이 왜 친구이자 적이 되었는지 묻는 작업은 오늘날에도 이데올로기 문제를 겪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대에게 영향을 주며 자신을 성장시켜 온 대가들을 비교・대조하여 그들의 삶과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프레너미(Friend十Enemy) 시리즈. 지금까지도 프랑스 대중에게 사랑받는 두 사상가가 남긴 논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목 차

들어가는 말

시작하며
1. 프레너미, 사르트르와 카뮈
2. 무엇을 비교하나

제1장 구토와 부조리
1. 비슷한 시대적 감수성
2. 구토란?
3. 부조리란?
4. 구토와 부조리의 차이는?

제2장 나-너-우리: 갈등과 공존
1. 타자, 나의 지옥
2. 타자, 나의 낙원
3. 사르트르의 『무덤 없는 주검』
4. 카뮈의 『페스트』

제3장 진보적 폭력과 목적-수단
1. 유토피아와 좌파 신화
2. 진보적 폭력과 목적-수단의 문제
3. 사르트르의 『톱니바퀴』
4.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

제4장 문학론 비교
1. 사르트르: 개인과 이웃의 구원을 위한 문학
2. 카뮈: 통일성 회복을 위한 문학
3. Engagement(참여)과 Embarquement(승선)

글을 맺으며
1. 비교하지 못한 것
2. 프레너미
3. 남긴 것

참고문헌
변광배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에서 사르트르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제2의 성: 여성학 백과사전』,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읽기』, 『사르트르와 폭력: 사르트르의 철학과 문학에 나타난 폭력의 얼굴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알랭의 행복론』, 『사르트르 평전』, 『프랑스 인류학의 아버지, 마르셀 모스』,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카뮈: 우정과 투쟁』 등이 있다.
불안과 전쟁을 지나며 성장한 두 사상가,
냉전의 시대를 지나며 서로 다른 길을 가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친구-적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변광배 교수의 친절하고 깊이 있는 분석이 펼쳐진다!

‘구토’와 ‘부조리’, 불안과 고뇌의 시대를 건너다

사르트르와 카뮈 두 사람이 성장하던 20세기 초엽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혼돈 그 자체였다. 산업혁명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뉘어 계급 갈등이 벌어졌고, 제국주의의 팽배, 그 끝에 벌어진 1차 세계대전…. 격변하는 시대를 겪으며 19세기 말부터 서구 사회는 대전환을 맞이한다. 그동안 굳건히 믿어 온 전통적인 세계관, 가치관, 인간관이 무너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기존의 가치관을 잃어 불안했고, 새로운 가치관을 찾기 위한 고뇌를 이어 갔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불안과 고뇌로 가득 찬 시대를 지나며 ‘구토’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의 인식 속에서 규정되어 있던 사물이 어느 순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에게 이질감을 준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인간-사물의 관계가 해체되어 인간에게 ‘구토’를 일으키는 현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듯, 인간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을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카뮈 역시 ‘부조리’로 불안과 고뇌의 시대를 설명했다. 부조리는 단절을 전제한다. 나와 나, 나와 사물, 나와 타자 사이의 단절을 느끼는 감정이 바로 부조리라고 카뮈는 말한다. 그는 이런 부조리한 감정 속에서 문득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단절을 극복하는 힘이 생긴다고 본다.
사르트르와 카뮈 두 사상가는, 아주 비슷한 시대적 감수성을 지닌 채로 ‘구토’와 ‘부조리’로 불안과 고뇌의 시대를 건넌다.

‘폭력으로 이어진 우리’와 ‘반항으로 연대하는 우리’, 강철과 불의 시대를 건너다

1차 세계대전 후 여전히 불안과 고뇌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2차 세계대전이라는 포화 속으로 내몰려야 했다. 사르트르와 카뮈 역시 최고의 지적 생명체라고 자부했던 인간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전쟁을 겪으며 ‘나와 타인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던졌다.
사르트르는 여기에 대단히 차가운 진단을 내렸다. 그는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단결을 도모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들 사이의 개인적 관계도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집단마저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계급 투쟁으로 귀결되고 만다고 본 것이다. 또한, 양쪽으로 나뉜 집단이 폭력을 통해 이상적인 집단을 성립하고 나서도, 이 집단을 존속시키기 위해 또다시 ‘폭력’으로 점철된 서약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반면에 카뮈는 타자를 ‘나’의 낙원이자 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 개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기보다 그들을 동정과 연민의 주체, 공존의 주체로 바라보기를 바랐다. 카뮈는 ‘나’ 개인의 존재보다 ‘우리’의 존재가 먼저라고 말한다. 따라서 부조리에 반항하는 ‘나’는 반항하는 ‘우리’로 연대하며, 협력적이고 자발적인 집단으로서 부조리에 반항한다고 본다.
두 사람은 상반된 ‘나-타자’ 인식을 가지고 강철과 불의 시대를 건넌다. ‘우리’란 과연 폭력으로 묶일 수밖에 없는 공동체일까, 연대감으로도 뭉칠 수 있는 공동체일까?

‘진보적 폭력’과 ‘목적-수단’, 얼어붙은 시대를 건너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냉전시대를 거치며 사상의 노선을 달리한다.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을 통한 혁명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카뮈 역시 계급 갈등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두 사람의 방법론이 달랐다.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가 제안한 ‘진보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혁명에는 ‘폭력’이 수반되고, 혁명의 완수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폭력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카뮈는 여기에 반대했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그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슬로건 아래서는 필수적인 폭력도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는 이미 인적, 물적 피해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상황에서 한계가 정해진 폭력은 세상을 바꾸는 데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카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한다면, 결국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목적의 순수함과 숭고함마저 퇴색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뮈는 1951년 『반항하는 인간』을 출간하며 이러한 자기 생각을 굳혔고, 결국 사르트르와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진보적 폭력과 목적-수단의 문제를 던진 얼어붙은 시대를 건너며 결국 서로 다른 경로를 택하고 만 것이다.

이 책은 사르트르와 카뮈의 글, 작품을 자세히 분석하여 작품 속에 드러난 두 사람의 사상을 낱낱이 파헤치고, 두 사상의 유사한 점과 상반된 점을 짚어 낸다. 1, 2차 세계대전, 냉전시대라는 격변기를 지나며, 인간의 고독과 불안, 본능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르트르와 카뮈. 친구-적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두 사람의 탁월한 통찰력을 만나는 이 책은, 우리에게 흥미진진한 지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pp.12-13 같은 시대를 살면서 최고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던 어떤 두 사람이 ‘친구-적’으로 분류되는 경우, 그런 분류가 조금은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경우가 없지 않다. 하지만 사르트르와 카뮈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의 ‘친구-적’ 관계는 이른바 공개서한을 통해 만천하에 공표되었으며, 그런 만큼 공식적이다. […] 이미 그들의 관계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p.38 우리는 보통 일상생활 속에서 사물을 그것의 도구성과 유용성의 잣대로 재단하기 일쑤이다. 여기에 ‘의자’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것은 보통 편리함, 가격, 내구성 등 도구성과 유용성의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의자라는 ‘말’, 도구성, 유용성이 사라지고 그것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는 경우가 없지 않다.

p.63 카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삶’, 그것도 현재의 삶 그 자체이다. 그에게 오늘을 희생하면서 내일의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p.79 또한 사르트르는 이 두 집단이 ‘폭력’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을 생각하자― ‘융화집단’, 즉 이 두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 투쟁, 폭력, 소외가 없다고 여겨지는 이상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나서도, 결국 이 집단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또다시 ‘폭력’ ―이것이 ‘서약’이다― 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p.87 그런데 ‘우리’, 곧 ‘연대성’은 반항적 주체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반항을 알 수가 없고, 따라서 반항을 할 수도 없다. 그로부터 내가 반항의 주체가 될 때, ‘나’는 이미 반항하는 ‘우리’에 속해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p.114 특히 포로로 잡혀 있는 5명의 마키대원들은 융화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집단을 존속시키기 위해 그들 모두는 서로 ‘서약’에 해당하는 ‘작은 폭력’의 사용을 용인한다. 소르비에의 자살과 프랑수아의 교살이 거기에 해당한다.

p.139 또한 자원보건대는 그 존속을 ‘서약’에 의지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4명의 구성원들이 공개적으로 서약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암묵적으로 끝까지 페스트에 맞서 투쟁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4명 중 누군가가 이 서약을 위반했을 경우에 그를 처벌할 수 있는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 물론 4명은 굳건한 형제애를 나누고 있지만, 이 형제애에는 폭력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p.159 사르트르는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진보적 폭력을 옹호하면서 그 나름대로 ‘필요한 폭력’과 ‘무용한 폭력’을 구분하고 있다. 필요한 폭력이 진보적 폭력에 해당한다.

p.160 어쨌든 목적이 정당하다면 거기에 이르는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논리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따른다. 하나는 목적이 정당하다는 것을 누가 결정하느냐의 문제이다. […] 그다음으로 ‘목적-수단’의 관계에서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p.197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제시하고 있는 주장의 핵심은 인간의 생명을 앗아 가는 살인이 어떤 경우에도 논리적으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p.211 사르트르에 의하면 문학작품이란 ‘쓰기 행위’의 주체와 ‘읽기 행위’의 주체인 ‘작가-독자의 협력’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사르트르에 의하면 작가가 성실하게 쓰기 행위에 임하는 경우, 그는 그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지배세력과는 항상 적대 관계에 있고, 그들의 이익에 ‘유해’하다. 그런 지배세력에 속하는 자들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작가의 작품을 읽어 줄 것인가?

p.223 이렇듯 카뮈는 문학을 반항, 그것도 개인적 반항과 집단적 반항의 유력한 한 수단으로 여기면서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잃어버린 통일성의 회복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