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저 자 한상연
발행일 2021-12-06
판 형 변신A5판(140x220)
ISBN 9791166840623
페이지수 308
정 가 22,000




“생생한 체험적 현실의 진실만을 추구하라!”
삶의 진실은 메마른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리니
생생한 감각적 체험을 통해 존재의 진실을 체득하는 법을 배우라!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는 위대한 그림들에 대한 철학적 해설을 읽어 나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도록 할 목적으로 기획된 책이다. 위대한 철학이 대개 그렇듯이, 하이데거의 철학은 결코 지적인 추론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체험적 현실을 가슴으로 생생하게 느껴 보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을 위대한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해 보는 것은 매우 탁월하고 유용한 방식이다. 철학도 예술도 실은 체험적 현실을 표현하는 상이한 방식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는 머리로 헤아리려 할 때는 어렵기만 했던 하이데거의 철학을 생생하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 한상연 교수가 들려주는 ‘그림’과 ‘철학자’의 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철학자는 근현대의 철학자들의 철학과 예술가들의 그림을 함께 보여 줌으로써, 대중들이 철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그림으로 보는 니체』를 시작으로 아래의 철학자들과 그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출간 도서
- 그림으로 보는 니체
-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출간 예정
- 그림으로 보는 들뢰즈
- 그림으로 보는 푸코
- 그림으로 보는 사르트르
글쓴이의 말

제1장 하이데거와 앙리 루소
앙리 루소의 초현실주의 회화와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

제2장 하이데거와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의 상징주의/아르누보 회화와 하이데거의 ‘죽음의 선구성’ 개념

제3장 하이데거와 에곤 실레
에곤 실레의 표현주의 회화와 하이데거의 세계 개념

제4장 하이데거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장르화와 하이데거의 도구 개념

제5장 하이데거와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의 현존재-사물 회화와 하이데거의 홀로-있음/함께-있음 개념

제6장 하이데거와 피터르 브뤼헐
피터르 브뤼헐의 일상성 회화와 하이데거의 일상세계 개념

제7장 하이데거와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상주의 회화와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 개념
한상연

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를 함께 전공한 철학자.
철학과 예술, 문학은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가천대학교에서 예술철학, 문화철학, 종교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에서 여러 철학자와 함께 인문학 살리기, 민주주의교육 등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철학을 삼킨 예술』,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기쁨과 긍정의 종교』, 『공감의 존재론』, 『문학과 살/몸 존재론』, 『그림으로 보는 니체』 등이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의 철학자들과 함께 일반 시민을 위한 여러 철학교양도서를 공저했다.
인문학이란 삶을 보다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 슐라이어마허,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왔다. 이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삶을 이론과 체계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전통 철학적 경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다.
괴테의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오직 저 푸른 생명의 나무뿐이다.” 삶과 존재란 본래 이론과 체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임을 잘 드러내는 경구이다.
독일 보쿰대학교에서 철학, 역사학, 독문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논문에서는 니체와 바흐친의 철학을, 박사논문에서는 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을 함께 다루었다.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그림을 만나다

마르틴 하이데거라는 이름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그의 이름에서 그의 철학을 떠올릴 것이고, 어떤 이는 그의 이름에서 그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철학자를 떠올릴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 실망스러웠던 그의 행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그의 행보, 관계 그리고 철학 모두가 그라는 사람을 이룬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사람들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하이데거가 20세기 철학에 남긴 그 발자취는 그 누구보다 거대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렇게 누구보다 거대한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주저는 누가 뭐라 해도 『존재와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려 시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새로운 용어라는 장벽과 난해한 철학이라는 철벽에 막혀 좌절하기가 십상이다. 저자는 철학도조차도 이 책을 어려워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하이데거의 철학은 아직 온전히 이해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20세기 최대 철학자의 철학을 비껴가야만 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의 철학을 마주해야 한단 말일까?
잠깐 다른 얘기로 돌아서 보자. 그림은 어떠한가? 사람들 대부분은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의 미학적 의의는 잘 알지 못하기 마련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혹은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며, 입체주의라든지 인상주의라든지 하는 개념들을 이해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잘 적용된 그림인지, 그래서 그것이 그 그림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이바지하고 있는지 계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그 그림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압도되면서, 그 그림이 안겨 주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그저 느껴 본 적이 더 많지 않은가?
우리는 예술을 보며, 그것을 분석하기보다는 그저 감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예술가들 또한 아마도 자신의 작품을 이리저리 해체하여 분석하기보다는 그저 느끼기를 더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마주하는 적합한 방식은 어쩌면 미학적 분석이 아닌 감각적 감상일 수 있는 것이다. 꼭 예술이 아니더라도 이처럼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그저 느끼려고 할 때는 무언가 깨달음을 줄 때가 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인 만큼 감성의 동물이기도 한 탓이다. 그런데 실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메마른 지성의 한계를 넘어 감각하라

우리 앞에 붉은 꽃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실로 ‘붉은’ 꽃일까? 예컨대 그것은 색맹이거나 색약인 사람, 나아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붉은 꽃일까? 더 나아가 내가 보고 있는 붉음은, 과연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보는 붉음과 같은 것일까? 이런 것들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 봐도 소용없는 짓이다. 과학은 당신에게 꽃이 붉게 ‘보이는’ 까닭은 빛의 흡수와 반사에 따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또 그 꽃에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다른 빛이 반사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성적으로 우리는 그 꽃이 붉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 꽃을 보며 그 꽃이 붉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꽃의 향기를 맡으며, 그 꽃이 향기롭다는 사실을 ‘안다.’ 꽃의 가시가 날카롭다든지, 꽃잎이 부드럽다는 사실 역시도 우리는 그저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이성적 비판 작용을 통한 인식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감각으로써 그 꽃이 어떻다는 것을 알 뿐이다. 당연히 이것은 꽃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갑자기 왜 꽃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궁금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꽃에 관한 이야기를 횡설수설하더니, 이제는 그것이 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은, 그것이 꽃이 아니더라도, 설령 구름이나 바다와 같은 것일지라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앞선 꽃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는 모두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은 메마른 지성으로 이해하려 했을 때는 잡히지 않던 것이 감각으로써 느끼고자 할 때는 우리 곁에 다가온다는 체험적 현실이다. 현실이라는 말을 진실로 바꾸어 보아도 여기서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우리의 메마른 지성은 일단 제쳐 두고, 우리에게 체험적 현실을 알려 주었던 감각을 한번 이용해 보자.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색다른 방법을 이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어쩌면 아무런 기대도 없이 했던 시도가 우리에게 돌파구를 선물할지 모른다. 안 그래도 어려운 하이데거의 철학을 그림을 통해서 이해하라니, 별 믿음이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차피 이해하기 어려웠던 철학이니, 밑져야 본전 아닌가. 적어도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할 새로운 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생생히 체험함으로써만 존재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체험적 현실이고 감각이란 말인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의 근원적 자리는 ‘어떤 것을 순연히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받아들임’, 즉 아이스테시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만나고 인지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우리가 인지한 그대로라는 것을 로고스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어떻게 인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어떻게 인지했다는, 즉 우리에게 그 존재가 어떻게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간단히 생각해 보자. 지금 당신이 만난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는 강렬한 색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색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그 색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을까? 당신이 받아들인 그 색이 절대적인 참이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그 색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즉 당신에게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색은 그 강렬한 색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감히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당신의 체험적 현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신의 체험적 현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상대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드러난 현상만이 존재의 전부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즉, “현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존재는 동시에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진실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생히 체험함으로써 그 존재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현실(탈은폐)과 그를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는 그 내면에 감추어진 존재의 진실이 존재함(은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하이데거의 철학을 넘어 삶과 존재의 근원적 현상을 향해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의 지도도 없이 삶과 존재의 근원적 현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조금 도움을 받아 보자, 이 책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는 그림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림이 우리 “자신의 삶에 불러일으킨 체험적 현실을 음미하고” 그를 통해 “감각이란 감각하는 자의 존재에서 일어나는 변화로서만 가능하다는 단순하고도 자명한 존재론적 진실”과 만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제1장 하이데거와 앙리 루소
하이데거의 어법을 차용하자면, 루소의 회화가 내보여 주는 초현실성은 우리가 사실적이라고 믿고 있는 현상적 세계 이면에 감추고 있던 존재론적 진실의 드러남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현상적 세계의 이면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표상될 존재의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식의 생각은 잘하지 못한다. … 그러나 현상이 존재 자체의 탈은폐이자 은폐라는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현상적 세계의 이미지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제2장 하이데거와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그림 속에서 삶과 죽음의 세계가 자아내는 강렬한 대조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제시하는 죽음의 존재론에 대한 일종의 예술적 보론이라 할 만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현존재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다. 여기서 ‘죽음을 향해 감’이란 그저 생물학적으로 모든 생명체가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과 점차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존재함 같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제3장 하이데거와 에곤 실레
실레와 같은 인간에게서 일상세계의 친숙함, 죽음의 선구성 등의 의미는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설명한 것보다 더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 하이데거는 감각이 우리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자각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형이상학적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데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제4장 하이데거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그런데 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페르메이르의 회화와 하이데거의 존재론 사이의 공통점이 하나 드러난다. 하이데거에게 그가 로고스보다 근원적인 진리의 자리라고 명명한 아이스테시스는 이미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함이다. 어떤 논리적 추론도 없이 그 무엇을 순연하게 감각적으로 발견하고 인지하면서, 우리는 동시에 존재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뜻이다.

제5장 하이데거와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는 종교적이었는가? 그의 생애를 살펴보건대, 별로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예술 작품의 존재론적 의의를 해명하면서 사물 및 사물성 개념에 주목했듯이, 피카소 역시 사물 및 사물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가능성을 끝없이 모색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 피카소는 인간의 삶과 존재에서 단순히 일상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초월적 근거를 향해 나아가려 했던 것이다.

제6장 하이데거와 피터르 브뤼헐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현존재는 누구나 일상세계 안에 빠져 있는 존재자이다. 인간 현존재는 모든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일상세계를 지배하는 도구적 의미 연관에 따라 도구적 쓰임새를 통해 해석되어야 하는 것으로, 발견한다. 〈갈보리 언덕으로의 행진〉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조차도 인간 현존재의 이러한 경향을 되돌리는 데 무력할 뿐이라는 것을 웅변하는 듯하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군중의 대부분은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져 버린 예수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제7장 하이데거와 빈센트 반 고흐
『예술 작품의 기원』에서 하이데거는 고흐의 〈신발〉(1886)에 관한 유명한 에세이를 남긴다. 난해하고 복잡한 이 에세이의 핵심적인 전언은 예술 작품이란 결국 존재 자체의 드러남이라는 의미의 진리, 즉 알레테이아라는 것이다. 고흐의 그림을 통해 존재 자체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화가는 신발을 단순한 도구로만 해석하지 않고, 도리어 신발의 이미지를 통해 농부라는 한 존재자의 세계가 드러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