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세창클래식 014]
지식인의 아편
저 자 레몽 아롱 지음/ 변광배 옮김
발행일 2022-01-05
판 형 신A5판
ISBN 9791166840708
페이지수 432
정 가 22,000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라는 아편은 사람들에게 폭동을 자극한다.

민주주의의 결점에 대해서는 가차 없으면서도 올바른 교리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최악의 범죄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지식인들의 태도를 설명하고자 하면서, 나는 곧 좌파, 혁명,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신성한 어휘들에 부딪히게 되었다. 나는 그것들의 신화에 가해지는 비판을 통해 역사에 대한 숭배를 성찰하게 되었으며, 사회학자들이 아직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하나의 사회 범주에 관련된 문제를 검토하게 되었다. ‘인텔리겐치아’가 그것이다.
좌파 가족의 일원이었던 내가 그 가족에게 바치는 이 책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나는 그 가족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쪽으로 기운다. 이것은 고립 속에 잠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증오 없이 투쟁할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광장에서의 논쟁을 인간의 운명의 비밀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동조자들을 선택하기 위해서이다.
서문


제1부 정치적 신화

제1장 좌파의 신화
회고적인 신화
가치의 분리
제도의 변증법
이상과 현실

제2장 혁명의 신화
프랑스 대혁명과 군소 혁명
혁명의 위엄
반항과 혁명
프랑스의 상황은 혁명적인가?

제3장 프롤레타리아트의 신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의
현실적 해방과 관념적 해방
관념적 해방의 유혹
현실적 해방의 평범성

정치적 낙관주의에 대하여


제2부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

제4장 성직자들과 신도들
당의 무오류성
혁명적 이상주의
재판과 자백
이른바 혁명적 정의에 대하여

제5장 역사의 의미
의미의 복수성
역사의 단위들
역사의 목적
역사와 광신주의

제6장 필연성의 환영
우연적 결정론
이론적 예견
역사적 예견
변증법에 대하여

역사의 지배에 대하여


제3부 지식인들의 소외

제7장 지식인들과 그들의 조국
‘인텔리겐치아’에 대하여
인텔리겐치아와 정치
지식인들의 낙원
지식인들의 지옥

제8장 지식인들과 이데올로기
주요 사실들
국가적 토론
일본의 지식인들과 프랑스 모델
인도와 영국의 영향

제9장 종교를 찾는 지식인들
경제적 의견 또는 세속 종교
투사와 동조자
시민 종교에서 스탈린주의로
세속적 교권주의

‘인텔리겐치아’의 운명


결론 ·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날 것인가?

옮긴이의 말
지 은 이 레몽 아롱(1905-1983)

사르트르와 더불어 20세기 프랑스의 ‘인텔리겐치아’를 양분하고 있는 아롱은 1924년에 사르트르와 함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1928년에 철학 교수자격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930년대 초에 베를린 소재 프랑스 연구소에 머물면서 독일 철학과 사회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나치즘의 부상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런던으로 건너가 『라 프랑스 리브르(La France libre)』지의 주간으로 활동하면서 드골 장군과 함께 조국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귀국 후에 『콩바(Combat)』, 『르 피가로(Le Figaro)』 등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1955년에 소르본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70년부터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 독일 사회학(La Sociologie allemande contemporaine)』, 『역사철학 입문(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histoire)』, 『민주주의와 전체주의(Démocratie et totalitarisme)』, 『대분열(Le Grand schisme)』, 『국가 간 평화와 전쟁(Paix et guerre entre des nations)』, 『계급투쟁(La Lutte des classes)』, 『폭력의 역사와 변증법(Histoire et dialectique de la violence)』, 『참여적 방관자(Le Spectateur engagé)』, 『회고록(Mémoires)』 등 50여 권이 있다.

옮 긴 이 변 광 배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프랑스 몽펠리에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네르바 교양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프랑스 인문학 연구모임 ‘시지프’를 이끌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제2의 성》: 여성학 백과사전』,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읽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자살: 사회학적 연구』, 『롤랑 바트르, 마지막 강의』, 『사르트르 평전』, 『레비나스 평전』, 『마르셀 모스 평전』,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카뮈: 우정과 투쟁』 등이 있다.
레몽 아롱, 우리가 모르던 사상가

레몽 아롱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특히 그와 동시대에 여러 사상적 자취를 남긴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카뮈라는 거대한 이름에 비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르트르와 아롱이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도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롱 자신은 한국에 관하여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 초기부터 북한의 도발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지금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사르트르와 같이 우리나라에 귀책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당시를 생각해 보면, 그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여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아롱이라는 인물을 우리는 다시 조명해야 할까? 그것은 21세기 들어 시작된 아롱의 ‘복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르트르의 고장, 프랑스에서는 21세기 들어 아롱의 복권과 사르트르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왜 프랑스는 갑자기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사르트르를 밀어내고 아롱을 높여 주기 시작했을까? 프랑스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이 놀라운 현상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르트르의 몰락과 그 사상적 적대자의 부흥이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놀라운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아롱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는 자신도 사회주의자로서 ‘좌파 가족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아롱이 좌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해방된 프랑스에서는 ‘소외된’ 지식인으로서 좌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스스로 ‘외톨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스스로 ‘추방당한’ 지식인이 되어 ‘고립된 섬’ 같은 처지를 자처했을까? 그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프랑스 지성계는 그를 외면했지만, 그는 끝까지 ‘지식인’으로 남았다.
다시 앞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프랑스 지성계는 다시 아롱을 주목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이른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 좌파의 위기로부터 기인했다. 혁명은 이제 그 방향을 바꿨다. 사람들은 총체적 혁명보다는 분자적 혁명을 주장했다. 소련은 몰락했고, 좌파 지식인들은 길을 잃었다. 이러한 좌파 지식인의 실종 상황 속에서, 그들이 그동안 배척해 왔던 아롱을 되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 그리고 되돌아본 자리에는 묵묵히 지식인의 길을 걸어간 하나의 위대한 지성이 서 있었다. ‘배반자’ 레몽 아롱의 승리였다.


신화, 역사 그리고 소외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서명을 들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혹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그 유명한 말을 떠올렸는가? 그렇다면 바로 짚었다. ‘지식인의 아편’은 바로 그 ‘민중의 아편’에 대응하는 말로서 공산주의가 바로 지식인의 종교이며 아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롱은 공산주의라는 아편에 취해 있던 프랑스 지식인들을 비판하기 위한 이 책을 세 개의 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정치적 신화”,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 “지식인들의 소외”가 그것이다.
1부에서 다루고 있는 ‘정치적 신화’란 ‘좌파’, ‘혁명’,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세 가지 신화를 말한다. 아롱은 이 부에서 역사상에서 통일된 ‘좌파’라는 건 없다고 말한다. 이어서 좌파를 자처하는 자 중 도대체 누가 진정한 좌파냐고 묻는다. 또 ‘혁명’은 그 과정에서의 재앙은 사라진 채, 위엄만이 남았다고 말하며, 도대체 어디까지가 혁명이고 어디부터는 혁명이 아닌지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명’,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하나의 단결된 ‘집단’이 과연 존재하느냐고 묻는다. 아롱은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신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는 ‘역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부에서 말하는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를 지엄한 심판대로 여기는, 이른바 ‘역사의 판결’과 같은 생각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에 특정한 ‘길’이 정해져 있다는 계시적 역사관을 말한다. 아롱은 역사에 대한 ‘성직자들과 신도들’을 비판하면서, 역사의 최종적 의미나 필연성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역사에는 과연 최종적 목적지가 존재하는가? 역사는 과연 누구의 승리를 공언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부인 ‘지식인들의 소외’는 뭔가 동떨어져 보인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신화가 무너지고 역사의 의미가 무너진 자리에는 ‘소외’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롱은 먼저 ‘지식인들과 그들의 조국’ 간의 관계, ‘지식인들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결국 종교를 찾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이상과 다른 조국, 그들의 현실과 다른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종교에 기대게 된다. 공산주의는 바야흐로 ‘지식인의 아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광신적 믿음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

그런데, 지금 도대체 누가 공산주의를 추앙한단 말인가? 물론 소련의 몰락 이후로 공산주의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대개 전향하거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도대체 왜 『지식인의 아편』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롱이 이 책에서 무엇보다 비판하고자 한 것은, 이른바 공산주의에 대한 광신적 믿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른바 ‘광신적 믿음’이 공산주의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광신적 믿음은 비판적 사유를 수용하지 않는 일종의 경향이다. 우리가 『지식인의 아편』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비판적 사유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우리에 대한 비판적 사유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비판적 사유는 오직 내가 아닌 상대편에게 향할 때만이 ‘비판적’이다. 최근 한 진보 논객의 행보에 대한 여권의 비판 -그것을 비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준다. 그 행보에 대한 호불호, 혹은 가타부타의 문제는 제쳐 놓더라도 우리 편이 아니면 우리 진영이 아니며, 우리 진영이 아니면 반대 진영이라는 그 논리는 유치하고도 철 지난 ‘사상검증’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줄을 똑바로 서라는 일종의 겁박이 아닌가!
그렇게 비판의 자유를 부르짖던 세력은 이제 어디에 갔는가? 테러방지법을 막겠다던 필리버스터를 기억한다. 지금, 그 처절한 외침은 어디에 갔는가? 그렇게 악법인 테러방지법은 왜 폐지되지 않고 있는가? 오히려 국가적 ‘검열’은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아롱은 혁명이 성공하면 혁명가는 “지금껏 비난해 온 모든 것을 혁명의 이름으로 용서하게” 된다고 말한다. 촛불 ‘혁명’도 예외는 아니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면, 어김없이 ‘사상검증’의 잣대가 향해 올지 모른다. 답변은 프랑스의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기사 제목으로 대신하겠다.

“슬프다! 레몽 아롱이 옳았다(Raymond Aron avait raison. Hélas!)”

─Libération, 2 juillet 2017.
좌파의 신화는 역사의 운동은 각 세대의 부를 축적하는 행복한 종말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사회주의 덕택으로 부르주아들이 쟁취한 형식적인 자유에 현실적인 자유가 가미될 수 있다. 물론 역사는 변증법적이다. 현재 공산주의자들이 이 단어에 부여하는 것과 같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다. 제1장 좌파의 신화

혁명의 신화는 보완적이고 대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혁명의 신화는 인간사의 일상적인 흐름과의 급격한 단절이라는 기대를 조장한다. 혁명의 신화도 역시 과거에 대한 성찰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구제도와 양립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퍼뜨리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준비했던 사람들도 구세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은 예견하지도 않았고 또 바라지도 않았다. 제2장 혁명의 신화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계급의 불행에 대한 학문이기는커녕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를 유혹한 지식인들의 철학이다. 또한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재적 철학이기는커녕 고유한 목적, 즉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는 의사(疑似) 학문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선택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부르주아지를 향한 상승을 더 동경한다. 제3장 프롤레타리아트의 신화

정통파 공산주의자의 독단주의는, 진심이든 말뿐이든 간에, 비공산주의자는 물론이거니와 전향자, 배반자도 위협한다. 만일 성직자가 보편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가 이교도에게 새로운 신앙을 고백시키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이런 고백은 믿지 않는 자가 자기에게 부과된 믿는 자의 범주와 용어로 쓴 자서전의 형식을 취한다. 제4장 성직자들과 신도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결합되어 발생하는 오류는 또한 과거로 소급해 인간적 사실들을 알고자 하는 논리와 합치되지 않는다. 역사가, 사회학자, 법률가는 행동, 제도, 법률로부터 ‘여러 가지 의미’를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전체에 대한 ‘하나의’ 의미는 발견할 수 없다. 역사는 부조리하지 않다. 하지만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역사의 최종적인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제5장 역사의 의미

우리는 미래의 발전이 자본주의적 요소가 덜한 경제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이런 발전이 몇몇 기본적인 변수들 간의 충돌에 의해 생긴 융통성 없는 결정론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언할 뿐이다. 주요 방향만을 고려하더라도 이와 같은 발전은 단순한 필연성이 아니고 복잡한 역사를 이룬다. 제6장 필연성의 환영

지식인들은 그들의 조국과 제도들을 판단하면서 기꺼이 현재의 현실을 다른 현실과 비교하기보다는 오히려 관념들과 대조시킨다. 예컨대 오늘의 프랑스를 어제의 프랑스와 비교하는 대신에 오히려 프랑스는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자신들의 관념과 비교한다. 인간의 제도 중 그 어떤 것도 훼손을 당하지 않고 그런 시련을 견디어 내지는 못한다. 제7장 지식인들과 그들의 조국

공산주의의 독자성을 구성하는 것은 이론의 독단과 투사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이다. 이런 공산주의는 지성적 차원에서는 진보적 이데올로기의 개방된 자유로운 해석보다 열등하지만, 신앙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아마 더 우월할 것이다. 더 이상 아무것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지식인은 이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확신을 원한다. 그는 체계를 원한다. 혁명은 그에게 아편을 제공한다. 제8장 지식인들과 이데올로기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 즉 사회 해석의 체계를 고안해 냈다. 이 체계 속에는 가치의 질서, 달성해야 할 개혁, 두려워하거나 희망할 수 있는 혼란이 담겨 있다. ‘이성’의 이름으로 기독교 교회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세속적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분적 지식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는 ‘진리’의 전달자들에게만 주어진 권력을 부러워했기 때문이었다. 제9장 종교를 찾는 지식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