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
저 자 한상연
발행일 2022-12-02
판 형 변신국판(140x220)
ISBN 9791166841361
페이지수 264
정 가 18,000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라고 명명된 이 책은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을 향한 필자의 두 번째 기획이다. 『순간의 존재』 머리말에서 필자가 했던 말은 이 책을 위해서도 유효하다. 이 책의 내용을 적확하게 이해한 독자라면 필자가 열어 놓은 철학적 사유의 새로움을 직감하고 전율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하이데거는 자신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현존재를 죽음을-향한-존재로 규정한다. 『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일상세계는 친숙한 세계로서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처이다. 필자가 이미 이전의 다른 저술에서도 밝혔듯이, 바로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 존재론의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드러난다. 일상세계란 도리어 잠재적·현실적 죽음의 일상화를 그 가능 근거로서 지니는,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본래적으로 참혹한 세계이다. 일상세계가 잠재적·현실적 도살자들의 세계라는 존재론적 진실로부터 어떤 부조리극이나 잔혹극이 펼쳐 내는 암담하고 음울한 참상 같은 것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존재론적 진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머리말

1장 서론: 일상세계의 본래적 참혹함

2장 규범화된 일상세계와 죽음을-향한-존재

3장 자기의식과 존재

4장 존재론적 폭력으로서의 형이상학과 윤리

5장 사랑과 공감의 존재론 ―에곤 실레의 회화와 무덤-세계로서의 일상세계

6장 결론: 윤리의 이름으로 은폐된 폭력성을 극복할 유일무이한 근거로서의 존재론적 사유

참고문헌
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를 함께 전공한 철학자.
현 한국현대유럽철학회 회장 및 한국하이데거학회 회장.
철학과 예술, 문학은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가천대학교에서 예술철학, 문화철학, 종교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에서 여러 철학자와 함께 인문학 살리기, 민주주의교육 등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시간과 윤리』, 『철학을 삼킨 예술』,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기쁨과 긍정의 종교』, 『공감의 존재론』, 『문학과 살/몸 존재론』, 『그림으로 보는 니체』,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등이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의 철학자들과 함께 일반 시민을 위한 여러 철학교양도서를 공저했다.
인문학이란 삶을 보다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 슐라이어마허,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왔다. 이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삶을 이론과 체계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전통 철학적 경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다.
괴테의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오직 저 푸른 생명의 나무뿐이다.” 삶과 존재란 본래 이론과 체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임을 잘 드러내는 경구이다.
독일 보쿰대학교에서 철학, 역사학, 독문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논문에서는 니체와 바흐친의 철학을, 박사논문에서는 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을 함께 다루었다.
이 책은 한상연 교수가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을 세상에 건네기 위해 철학자로서 해야만 했던 숙고의 두 번째 결과물이다. 책에 대한 소개에 앞서, 왜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이 필요했는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철학은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며,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하이데거조차도 (자기-기만 혹은 의도적 타자-기만으로 인해) 자신의 철학에서 배제해야만 했던 존재의 진실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책을 소개해 보자. 이 책의 제목은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이고, 제목 밑에는 어딘가 스산한 분위기가 풍기는 어머니와 아이들의 그림이 있다. 『순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우선은 제목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는 익숙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즉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규정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여기에 “윤리”가 더해지고 있다. 『순간의 존재』에서 설명했듯이 이 윤리는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에서 자기-기만 혹은 의도적 타자-기만으로 인해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던 개념이다. 쉽게 말해, 윤리는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에서 “너머”를 담당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미 현존재란 “규범적 의미연관에 다소간 종속된 정신으로 실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윤리가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그 근원이 되는 것임 역시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저자가 말하는 “죽음을-향한-존재”란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보다 강력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일상세계를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처로 규정했지만, 저자는 일상세계란 “일종의 존재론적 도살장”이자 죽음이 항상 임박한 “무덤-세계”라는 존재론적 진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향한-존재”는 “죽음을-사는-존재”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란 “언제나 이미” 죽음이 우리 곁에 임박해 있음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이 언제나 이미 우리에게 임박한 까닭은 우리를 단죄할 “윤리”가 언제나 이미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이 과격하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떠올려 보라. 우리는 “사회적 죽음”이라는 말을 흔히 쓰지 않는가. 이 말은 결국, 사회가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 있음을 우리가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이제 그림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에곤 실레는 이 그림에 “어머니와 두 아이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그림 속 어머니와 아이들에게서는 어딘가 모르게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왜 다정하고 사랑이 가득해야 할 어머니와 아이들에게서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일상세계가 본래적으로 “무덤-세계”이며, 인간은 본래적으로 “죽음을-향한-존재”인 탓이다. 따라서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아이가 마주해야 할 일상세계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체념할 수밖에 없다. 또 어머니 자신 역시 죽음을-향한-존재로서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고 『순간의 존재』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책이 이 그림 속 어머니와 아이들을 통해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너, 나, 우리,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보자. 결국, 이 책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에서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존재론적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세계는 일종의 “세계-무덤”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죽음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어느 때보다도 죽음이 일상화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이를 외면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진실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존재론적 진실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적 사유는 어떤 것일까? 이 책을 ‘적확하게’ 이해한다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존재를 몰아세우는 윤리 및 규범의 힘은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규범화된 정신으로서 자신뿐 아니라 타자 역시 심판하는, 더 나아가 심판에 의거해 처벌하는, 존재자라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현존재와 공동 현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는, 적어도 언제나 이미 규범화된 일상세계 안에-있음의 관점에서 헤아리는 한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잠재적·현실적 처벌자이자 도살자로서 존재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_머리말

죽음이란 무엇인가? 존재론적으로 보면, 죽음이란 일상적인 존재자로서의 자기의 완전한 부정과 무화의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규범화된 일상세계에서 부단히 자신의 죽음을 살도록 내몰리는 존재자인 셈이다. 규범을 따르기를 선택하든, 반대로 규범을 따르기를 거부하든, 현존재는 일상적인 존재자로서의 자기를 자기-아님으로서 심판하고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_1장 서론: 일상세계의 본래적 참혹함

일상세계 자체가 언제나 이미 규범화되어 있는 한에서, 새벽의 검은 젖(을 마심)은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방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그 까닭은 윤리와 규범이 삶과 살림의 가능 근거일 뿐 아니라 죽음과 죽임의 가능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우리는 규범화된 일상세계가 선물하는 질서의 젖을 마셔야 한다. 그러나 그 젖은 동시에 죽음의 젖이기도 하다. 질서를 세우고 보존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은 마땅히 존재할 자격과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_2장 규범화된 일상세계와 죽음을-향한-존재

아마 민감한 독자라면 현존재의 자기의식이라는 표현을 보고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하이데거는 의식 및 자기의식과 같은 용어들이 존재론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여기고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현존재의 존재를 자기의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기술하는 일은 자칫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전통적인 의식철학으로 퇴행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현존재의 자기의식에 관해 논하기로 결정했다. _3장 자기의식과 존재

윤리란 본래 명령하는 것이고,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며, 금지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방식은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엄격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윤리적 규범은, 그것이 보편타당한 것인 한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엄수되어야 한다. 즉 윤리적 규범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일종의 명령이다. 반면 행복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윤리적 규범에 따를지 말지는 각각의 개인이 알아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명령으로서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 것은 아니다. _4장 존재론적 폭력으로서의 형이상학과 윤리

실레의 예술에서 에로스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에 포함될 이유나 근거를 가장 적게 가진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실은 그 반대이다. 실레가 묘사하는 에로스의 세계는 그 자체가 이미 철저한 죽음의 세계이다. 그것은 죽음에 의해 언제나 이미 잠식된, 아마 살아 있는 시체들이라는 역설적이고 통속적인 표현이 적절할, 육체들의 세계, 죽음의 세계와, 그 안으로 돌이킬 수 없이 함입한 것으로서, 하나가 된 삶의 세계이다. ―에곤 실레의 회화와 무덤-세계로서의 일상세계

존재론은 물론 반-윤리적이지 않고, 반-윤리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오직 비-윤리적 존재론의 존재사유만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오직 비-윤리적 존재론의 존재사유만이 폭력(성)의 근원적 근거로서의 존재의 분열을 비-진리로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란 본래 선악의 피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악의 피안을 향한 존재사유의 길은 존재의 근원적 전체성의 회복을 향한 길, 절대적 내재를 향한 초월의 운동을 통해 언제나 이미 규범화된 일상성의 한계를 넘어가는 길이다. _6장 결론: 윤리의 이름으로 은폐된 폭력성을 극복할 유일무이한 근거로서의 존재론적 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