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772] 화양국지 (상)
저 자 상거(常璩) / 이은상, 임승권 역
발행일 2023-01-31
판 형 신국판(152*225) 양장본
ISBN 9791166841613
페이지수 452
정 가 36,000




동진(東晉, 317~420) 때 상거(常璩, 대략 291~361)가 편찬한 《화양국지(華陽國志)》는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지방지(地方誌)이다. 이 책은 신화의 시대에서 시작하여 동진 영화(永和) 3년(347)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감숙(甘肅), 섬서(陕西), 호북(湖北) 지역의 역사, 정치, 군사, 문화, 풍속, 인물 등 비교적 풍부한 중국 서남 지역의 고대 민족 사료를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해당 지역과 민족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지리, 정치사, 경제사, 민족사를 연구하는 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텍스트이다.
화양국지는 상거가 중앙의 시선이 아닌 지방정권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시간적으로는 원고시대부터 성한이 멸망하기까지, 공간적으로는 화산 남쪽에 위치한 파, 촉, 한중, 남중 네 개 지역, 즉 현재의 사천, 운남, 귀주, 감숙, 섬서, 호북에 이르는 중국 서남 지역의 역사, 지리, 풍속에 관해 서술한 책이다. 또한 파(巴), 촉(蜀), 저(氐), 강(羌) 등 30여 개 소수 민족들의 명칭과 분포 상황, 역사와 풍속뿐만 아니라 한족 정권과의 관계를 기록했다. 형식은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영향을 받아 편년체와 기전체가 결합된 전통적인 역사서의 서술방식을 따르면서 역사, 지리, 인물 등 세 가지 측면에서 화양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했다. 또한 각 지방별 물산과 문벌사족, 인재를 서술했다.
상권 차례
역주자의 말 4
권1 파지(巴志) 13
권2 한중지(漢中志) 73
권3 촉지(蜀志) 111
권4 남중지(南中志) 175
권5 공손술유이목지(公孫述劉二牧志) 235
권6 유선주지(劉先主志) 273
권7 유후주지(劉後主志) 319
권8 대동지(大同志)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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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도장(道將)이며, 촉군(蜀郡) 강원현[江源縣, 지금의 사천성 숭경현(崇慶縣)]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후한(後漢, 25~220) 때부터 진(晉, 266~420)나라 때까지 강원 지역에서 대대로 관리를 지낸 문벌사족이었다. 서진(西晉, 266~317) 말에 저족(氐族) 사람 이웅(李雄, 274~334)이 촉(蜀) 지역의 성도(成都)에 성한(成漢, 304~349) 왕조를 세웠다. 상거는 이 성한 왕조의 세 번째 황제인 이기(李期, 재위 334~338)와 네 번째 황제인 이수(李壽, 재위 338~343)의 시대에 사관(史官)으로 재직하면서 《양익이주지지(梁益二州地志)》, 《파한지(巴漢志)》, 《촉지(蜀志)》, 《남중지(南中志)》를 저술했다. 여기에서 당시 수많은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인 성한 왕조의 통치자들이 대내외적으로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작은 지방정권의 사관이었던 상거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급변했던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서남을 바라보게 되었다. 동진(東晉, 317~429) 영화(永和) 3년(347)에 환온(桓溫, 312~373)이 촉 지역을 정벌하자 그는 성한의 마지막 황제인 이세(李勢, 재위 343~347)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다. 상거는 그 공을 인정받아 중원(中原)의 문벌사족들이 주축을 이룬 동진 정부에서 관직 생활을 했지만 지역 차별로 인해 그의 벼슬길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에 그는 멸망한 성한 왕조에 대한 회한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예전에 저술했던 《양익이주지지》, 《파한지》, 《촉지》, 《남중지》 등을 모아 중국 서남 지역의 역사인 《화양국지(華陽國志)》를 편찬했다. 상거는 제국에 소속된 사관이 아니라 지방정권인 성한의 사관으로서 파(巴), 한중(漢中), 촉(蜀), 남중(南中) 등 지역의 정체성을 표상하는《화양국지》를 기술하여 최초로 중국 서남 지역의 역사를 썼다.

_역주자

이은상(李垠尚)
한국과 미국에서 중국 문학을 공부했다. 중국 신화와 소설에 관한 내용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썼다.
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있다.
2007년에 출간된 《시와 그림으로 읽는 중국 역사》를 시작으로 2021년에 《이미지 제국: 건륭제의 문화 프로젝트》가 나오기까지 10권의 책을 썼다. 대학원 시절 조식(曹植, 192~232)을 전공한 스승 Prof. Robert Joe Cutter의 가르침을 받으며 《화양국지(華陽國志)》를 처음 접했다.

임승권(林承權)
1955년 대구에서 출생했으며 서울에서 성장했다.
오랜 시간 대만과 홍콩, 중국 대륙을 오가며 중국의 토지경제를 공부했다. 국토연구원 동북아연구팀과 토지공개념연구위원회에 참여했다. 대만의 국립정치대학에서 〈土地使用分區管制之比較硏究〉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시아나 항공에 입사하여 금호그룹의 임원으로 중국 내 업무와, 금호고속 정비공장장을 지냈다. 전경련 국제경영원, 한국무역협회 등에서 강의했으며, 청운대학교 중국학과에서 정년퇴직했다.
저서로는 《중국토지제도론》, 《중국학개론》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중국경제대추세》, 《중국 풍류를 마시다》, 《마오쩌둥의 의식주》 그 밖에 다수의 중국 관련 논문이 있다.
동진(東晉, 317~420) 때 상거(常璩, 대략 291~361)가 편찬한 《화양국지(華陽國志)》는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지방지(地方誌)이다. 이 책은 신화의 시대에서 시작하여 동진 영화(永和) 3년(347)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감숙(甘肅), 섬서(陕西), 호북(湖北) 지역의 역사, 정치, 군사, 문화, 풍속, 인물 등 비교적 풍부한 중국 서남 지역의 고대 민족 사료를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해당 지역과 민족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지리, 정치사, 경제사, 민족사를 연구하는 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텍스트이다.

《화양국지》는 체제가 완비되고 자료가 풍부하며, 고증 또한 충실하여책이 편찬되자마자 세인(世人)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범엽(范曄, 398~445)의 《후한서(後漢書)》, 배송지(裴松之, 372~451) 주(注) 《삼국지(三國志)》는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으며, 이후에도 최홍(崔鴻, 478~525)이 저술한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라든가 역도원(酈道元, 466~527)이 쓴 《수경주
(水經注)》, 남북조(南北朝) 양(梁, 502~557)나라 때 역사가 유소(劉昭)가 주(注) 한 《후한지(後漢志)》 등 중국 서남 지역 역사를 다룰 때마다 이 책을 인용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정사(正史) 위주의 역사 서술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정사에서 다루지 않는 지방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중국 역사 연구의 편향이 어느 정도 극복되기를
기대한다.
p. 21 주(周)나라 말기에 파(巴)나라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파나라의 장군 만자(蔓子)가 초(楚)나라에 군사를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3개 성을 주기로 허락했다. 초왕(楚王)이 파나라를 구원했고, 파나라가 안정되자 초나라는 사자를 보내 약속한 성을 요구했다. 만자가 말하기를, “초나라의 영명함에 의지하여 화란을 제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진실로 초왕에게 성을 주기로 허락했으니 장차 내 머리로 사례할 것이지만, 성은 가져갈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마침내 만자가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고, 파나라에서 그의 머리를 초나라 사자에게 주었다. 초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파나라의 만자 같은 신하를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 하러 성을
요구하겠는가?”라고 했다.

p. 76 한고제(劉邦))가 진(秦)나라를 이기고 자영(子嬰)을 붙잡았다. 항우(項羽)가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하여 파, 촉(巴蜀) 31개 현을 다스리게 했다. 유방이 기뻐하지 않았다. 승상 소하(蕭何)가 계책을 말하기를, “비록 한중(漢中)을 다스리는 것이 싫으시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또한 사람들이 ‘은하수[天漢]’라 부르니 그 호칭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무릇 한 사람의 아래에 몸을 굽혀 만승(萬乘)의 위에서 뜻을 펼칠 수 있었던 자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한중을 다스려 그 백성들을 안무(安撫)하여 어진 이들이 이르게 하시고, 파, 촉을 거두어 쓰시고, 삼진(三秦)을 안정시키면 천하를 도모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p. 141 익주(益州)는 촉군(蜀郡), 광한(廣漢), 건위(犍為)를 ‘삼촉(三蜀)’이라 했다. 땅이 비옥하고 인사(人士)가 준일(俊逸)하여 익주 전체에서 명망이 높았다. 한나라 때 촉군과 광한 태수를 뽑을 때마다 덕행이 고상하고 지혜가 출중한 사람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앞에는 조호(趙護)와 제오백어(第五伯魚)가 있고 뒤로는 채무(蔡茂)와 진총(陳寵)이 있어 조정으로부터 표창(表彰)과 상을 하사받아 다른 군들과는 달랐다.

p. 260 건안 19년(214)에 관우(關羽)가 형주(荊州)의 일을 통괄했다. 제갈량(諸葛亮)과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동(巴東)을 항복시키고 파군(巴郡)으로 들어섰다. 파군 태수 파서(巴西) 사람 조착(趙笮)이 막으며 지키고 있었는데, 장비가 공격하여 그를 물리치고 장군 엄안(嚴顔)을 사로잡았다. 장비가 그에게 일러 말하기를, “대군이 이르렀는데, 어찌
하여 항복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운 것이냐?”라고 하자, 엄안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경(卿) 등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 주(州)를 침략하여 빼앗았다. 우리 주에는 단지 목이 잘리는 장군은 있어도, 항복하는 장군은 없다.”라고 했다

p. 286 건안(建安) 13년(208)에 유표(劉表)가 죽고 막내아들 유종(劉琮)이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 조조(曹操)가 남쪽 정벌을 나서자, 유종은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先主)는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조의 군사가 이르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완성(宛城)에 이르러서야 선주가 그 사실을알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철수했다. 당양(當陽)에 이르자 무리가 10만
여 명, 수레가 1천 량(兩)에 달하여 하루에 10여 리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따로 관우(關羽)를 보내 배를 타고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 사람이 선주에게 일러 말하기를, “빠르게 행군해야 합니다. 비록 많은 무리를 데리고 있지만, 갑옷을 입은 자는 적습니다. 조조의 군대가 이르게 되면 어떻게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선주가 말하기를, “무릇 큰일을 이루는 것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다. 지금 사람들이 나에게 귀의하여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차마 그들을 버리겠는가?”라고 했다.

p. 323 건흥(建興) 2년(224)에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승상부를 설치하고 익주 목(益州牧)을 겸하니,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마침내 제갈량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법도를 분명하게 보이며, 관직을 줄이고, 권제(權制)에 순응했다. 충성을 다하고 시세에 도움이 되는 자는 비록 원수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복종하여 진심을 드러내는 자는 비록 무거운 죄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했고, 유세하면서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는 비록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미미하다고 하여 상을 주지 않음이 없고, 악행이 작다고 하여 폄적하지 않음이 없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했고, 사물은 근본을 궁구했다. 명칭에 따라 그 실질을 살펴 허위적인 사람은 뽑아 쓰지 않았다. 마침내 촉나라 안에서 사람들이 그를 경외하고 소중하게 받들었다. 비록 형법과 정령(政令)이 준엄하여도 원망하는 자가 없는 것은 그 마음 씀이 공정하고 상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p. 392 유민들은 이상을 믿고 마음대로 협박하고 도둑질하니, 촉 땅 백성들이 그것을 근심했다. 경등이 여러 차례 은밀하게 표문을 올려 이르기를, “유민들은 억세고 어리석으며, 촉 땅 사람들은 겁이 많고 나약하여 나그네와 주인이 서로를 용납할 수 없으니, 마땅히 본래 땅으로 옮겨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쪽 세 군(郡)의 험한 땅을 주어 살게 해야 합니다. 저들의상황을 살펴보니, 점점 더 커지도록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화란이 양주(梁州)와 익주(益州)로 옮겨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