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
저 자 우치다 다쓰루 / 박동섭 역
발행일 2023-05-03
판 형 140*190
ISBN 9791166841958
페이지수 296
정 가 19,000





3,000페이지가 넘는 레비나스의 『탈무드 해설』을 번역하며 다진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깊은 통찰.
겸손함으로 철학을 설명하는 문예가 우치다 다쓰루,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안내자이기를 자처하다.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우치다 다쓰루는 다양한 저서들로 일본 문예계의 엄청난 위상을 자랑하는 신서대상, 탁월한 저작을 남긴 작가에게 수여하는 이타미 주조상,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휩쓸었다. 그런 그가 일본 문예계에 크나큰 충격을 던질 수 있던 사상적 저변에는 레비나스 철학이 단단하고도 깊게 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사상적 깊이, 설명하는 방식 등 그의 사상적 지반과 학문적 태도는 레비나스의 여러 저작들을 번역하고 레비나스에 관한 글을 저술하면서 배운 것들이다. 그래서 우치다 다쓰루는 자신을 레비나스의 ‘연구자’가 아닌 ‘제자’이기를 자처한다.
우치다 다쓰루는 일본 내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저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인문학이라는 장르에서, 그것도 난해하기로 유명한 레비나스의 철학을 주로 다루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대단한 유명세를 떨친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낯설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우치다 다쓰루가 그만한 명성을 얻은 것은 그의 글에는 레비나스 철학을 필두로 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특유의 탁월한 설명 방식이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우치다 다쓰루는 철학적 깊이는 물론 보기 드물게 글을 잘 쓰는 작가이다. 그 난해한 철학자 레비나스를 이렇게나 쉽고도 탁월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작가는 단언컨대 희소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렇듯 화려한 이력을 가진 우치다 다쓰루조차 필생의 사명이라고 부를 만큼 공을 들인 ‘레비나스 3부작’ 중 두 번째,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대한 내용을 다룬 책이다. 레비나스가 당면한 시대상황과 철학적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할 뿐 아니라 레비나스 저서에 대한 올바른 독해 방법은 무엇인지 또한 설명한다. 해설서들이 갖는 공통적인 틀, 즉 이론-해설이 반복되는 구조에서 벗어나 우치다 다쓰루 특유의 명쾌한 서술 방법으로, 마치 교사가 제자에게 다채로운 설명을 곁들이듯 해설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어판 서문 4
옮긴이의 말-과묵과 태만의 속사정 9
저자서문 22
인용문헌 약어 30

제1장 앎[知]에서 욕망으로 35
1. 난해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37
2. 물음의 반려 43
3. 라캉은 말한다. “욕망하라” 46
4. 욕망의 커뮤니케이션 50
5. 생성적인 읽기 54

제2장 텍스트 스승 타자 59
1. 완전기호 61
2. 스승으로서의 타자 69
3. ‘장어’ 혹은 ‘중간적인 것’ 76
4. 신발을 떨어뜨리는 사람 81
5. 반복과 욕망 88

제3장 이중화된 수수께끼 99
1. 대면 101
2. 저주를 받은 독학자 108
3. 타아와 타자 115
4. 교역과 주체 122
5. ‘괄호 안에 넣기’ 135
6. 거짓과 진실 146

제4장 ‘죽은 자’의 절박 155
1. 사체 157
2. ‘나’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164
3. 양심의 가책 170
4.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180
5. 죽은 자를 죽게 하자 190
6. 지향성 202
7. 절대적으로 외부적인 것 217
8. 에로스적 타자 224
9.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233
10. ‘그’와 ‘대체, 대역’ 243

제5장 죽은 자로서의 타자 249
1. 죽은 후의 나 251
2. 터부와 자책 261
3. 아버지 죽이기 267
4. ‘죄를 범한 나’와 ‘자책하는 나’ 272
단행본 저자후기 281
문고판 저자후기 285
지은이 우치다 다쓰루[内田樹]
사상가이자 무도가. 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고베여학원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가이후칸[凱風館]이라는 고베 소재 아이키도장의 관장으로 아이키도 수련을 지도하고 있다. 대학원 시절,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철학에 깊게 영향을 받아 반(反)유대주의와 유대교, 그리고 레비나스 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현재는 레비나스 철학과 카뮈의 철학 그리고 일본의 전통 무예인 아이키도에 기초하여 교육론, 무도론, 영화론, 만화론, 신체론, 예술론, 종교론, 미국론, 중국론, 한일론 그리고 정치론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집필 활동과 언론에서의 발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망설임의 윤리학』,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스승은 있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교사를 춤추게 하라』, 『완벽하지 않을 용기』 등이 있다.

옮긴이 박동섭
독립연구자. ‘‐연구자’라는 제도화된 아이덴티티로 살아가는 일의 한계를 실감하며 ‘아이덴티티 상실형 인간’으로 살고 공부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언어를 대중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알리고자 애쓰고 있다. 『동사로 살다』, 『레프 비고츠키』, 『해럴드 가핑클』, 『회화분석』,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 『상황인지』, 『우치다 다쓰루』를 썼고, 『보이스 오브 마인드』, 『수학하는 신체』, 『수학의 선물』, 『단단한 삶』,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스승은 있다』, 『망설임의 윤리학』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우치다 다쓰루의 고전적인 읽기 방식.
지식의 양이 아닌 배움의 자세가 사유의 질을 결정한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철학, 그중에서도 타자론과 윤리학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우치다 다쓰루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레비나스 해설서’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바와 달리 곧바로 레비나스의 이론을 소개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레비나스와 라캉이 (일본어 원작의 부제는 ‘라캉에 의한 레비나스’이다) 얼마나 난해하게 글을 쓴 학자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그들이 텍스트를 매우 어렵게 쓴 것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라는 질문을 던지게 함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 독해의 가장 원초적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수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쓴 레비나스론을 읽어도 아마도 여러분에게 “아하 그렇군. 그런 거였어. 이제야 레비나스를 알겠다”라며 무릎을 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레비나스를 직접 읽지 않고도 안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은 제가 가장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레비나스는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조술하는 것은 이것을 읽은 여러분으로부터 “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는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레비나스에 대한 결착을 맺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야기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이것을 읽고 “뭔가 점점 더 모르겠다”라며 머리를 부여잡고는 “자 그렇다면 내가 직접 레비나스를 읽을 수밖에 없겠군” 하고 결심하는 독자를 한 명이라도 늘리고 싶어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우치다 다쓰루는 해설서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글을 쓰고 있는 것과도 같다. 즉, 통상적으로 해설서에 기대하는 바, 명쾌하게 대상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도록 돕는 그 충실한 역할을 저버리겠다는 것이다. 왜 그런 식으로 글을 서술하는 것일까? 해설에 기대하는 바를 저버리고, ‘이렇게 이해하면 정말 쉽다’는 식의 서술 또한 저버리고, 오히려 레비나스와 라캉은 정말 난해하다는 당황스러운 서술을 할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레비나스를 명쾌하게 설명해 줄 생각도 없다니. 해설서로서는 황당무계한 도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우치다 다쓰루의 이러한 설명은 오히려 철학함의 가장 기본과 기초로 우리를 돌려놓고자 하는 의도에 있다.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의 ‘이론’은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고 무엇이 레비나스를 올바로 이해하는지 그 ‘태도’에 대해 쓰고 있다. 그 설명은 책의 도입부의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책의 마침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된다. 말하자면 레비나스 이론에 대한 설명이 레비나스를 올바로 이해하게 하지 않고, 레비나스를 알고자 하는 욕망과 태도가 레비나스를 깊이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우치다 다쓰루가 해설하는 것은 레비나스 해석이 아니라 레비나스를 독해하는 방법에 대한 해설에 가깝다. 다만 우치다 다쓰루 특유의 명쾌한 설명 방식으로 레비나스 독해로 가는 ‘방법’에 대해서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우치다 다쓰루는 위의 인용문의 직후에 다음과 같이 추가한다.

“이 책을 읽은 후, 실제로 레비나스 책을 들고 저와는 전혀 다른 읽기를 하는 독자(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독창적인 레비나스론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독자가 한국에도 등장해 줄 것을 저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독해가 아니고서는 텍스트라는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우치다 다쓰루는 스스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는 독해보다는 텍스트를 욕망하고 그 사상을 욕망하는 태도야말로, 그것이 비록 고전적인 읽기 방법일지는 몰라도 사유의 깊이를 통해 무한한 의미를 길어내는 독해, 언제까지고 제자로 남아있는 독해에서 벗어난 ‘스승이 되는 독해’라고 말한다. 물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책에서 무엇보다 ‘명쾌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앞에서 선 철학자
감히, 윤리를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절망 앞에서 선 한 철학자의 외침.

이 책이 그렇다고 단순한 ‘독해 방법’에 대한 책은 결코 아니다. 독해 방법이란 또 다른 타자인 레비나스를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의 일환이다. 즉, 레비나스 독해에 선행해야 하는 마음가짐이다. 따라서 마음가짐에 이어 본래 책이 목적하는 바에 따라 충실하게 레비나스 자신에 대해 설명한다. 레비나스 자신이 타자 문제를 통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자’를 진혼하는 일에 있었다. 본문의 일절을 살펴보자.

“‘홀로코스트’는 유럽 형이상학을 함양한 바로 그 풍토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홀로 코스트’ 이후 시대에 다시 그 동일한 형이상학을 토대로 비판을 하고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바라는 것은 절도를 잃어버린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해 경의를 잃어버린 행위입니다.
투명하고 예지적인 ‘주체’,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는 차갑고 중립적이며 관상적인 ‘앎’, 그러한 것을 유럽 문명 ‘재건’의 기반으로 삼는 것은 더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레비나스를 위시한 유럽의 철학자들은 과거 이성과 합리의 절정이라고 여겼던 유럽의 형이상학과 그 형이상학이 낳은 홀로코스트라는 참상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철학자’라면 그 누구도 그 참상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누군가 그 원인을 규명하려는 순간, 누군가의 책임으로 귀책될 수밖에 없고, 그 원인의 귀책은 필연적으로 책임 회피라는 함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의 책임을 말하는 순간 자신의 무책을 주장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유럽의 형이상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윤리적이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고, 동시에 무엇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출구없음의 상황’ 자체 또한 모든 유럽의 철학자들에게는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절망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절망의 시대가 레비나스에게 요청한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진혼이었다. 레비나스는 이 모든 책임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 안기로 한다. 레비나스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혹자가 보기에는 자신의 무책을 주장하며 히틀러와 하이데거를 발생시킨 주류 철학계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가할 수도 있었으나, 레비나스는 ‘살아남은 자’로서 하필 자신이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자신의 유책과 더불어 ‘죽은 자’들이 온전히 ‘죽을 수 있도록’ 그들을 산 자들의 법정에 세우기를 중단한다. 급기야 레비나스는 자신이 받은 박해에 대해조차, 더나아가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들의 수난에 대해서조차도 자신의 책임을 주장한다.

“과실을 범하지 않음에도 죄의식을 갖는 것, 마치 나는 타자를 알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시점에 타자와 관계를 맺어버린 것처럼, 이 죄상 없는 유책성이 중요합니다. 타자는 나에게 늘 무엇인가였고 타자의 ‘이방인’이라는 조건이야말로 나와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타자는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윤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비교적 잘 알려진 레비나스의 이와 같은 사유의 전개가 단지 타인의 고통을 스스로 떠 안기로한 철학자의 결단으로 그리는 다수의 해설서와는 달리, 우치다 다쓰루는 이 모든 것이 레비나스 자신의 고통이기도 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즉, 어떠한 상황을 만난 레비나스가 어떠한 이론을 만들어 냈다는 식의 단순한 인과로 그리지 않는다. 죽은 자들이 놓인 상황 앞에서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던 절망 앞에서의 한 철학자의 긴급한 책임으로서의 타자론을 그린다는 데에서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그 어떤 해설보다 레비나스의 생생한 시선을 그리고 있다.
p. 26 제 읽기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로 베어 버리는 읽기와는 꽤 다릅니다. ‘고르디우스 매듭’이란 고대 프리기아의 왕 고르디우스가 만든복잡하고 기괴한 매듭으로, 이것을 푼 자는 아시아의 패자가 되리라는 예언과 함께 전해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무도 풀지 못한 매듭을 자신의 검으로 단칼에 끊어 버렸고, 예언대로 아시아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난해한 사상을 해설할 때 많은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의 검’을 꺼내려 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레비나스를 읽을 때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페미니즘의 텍스트론을 적용하는 것은 ‘알렉산더의 검’으로해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으로 매듭은 분명 훌륭하게 잘릴 테죠.

마르크스주의적 읽기로는 레비나스는 ‘부르주아 시오니스트’에 지나지 않고 페미니즘적 읽기로는 ‘부권(父權)주의적 성차별주의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분류를 믿는다면 레비나스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는 모두 ‘망언’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검’ 같은 논리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로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쪽이 많은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p. 50 “라캉을 욕망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왜 라캉을 욕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p. 51 “자 그러면” 하고 청년은 말했다. ‘응’하고 말하는 그녀. ‘도착했어’라고 말하는 그. ‘도착했구나’하고 말하는 그녀. ‘응. 겨우 도착했어’라고 말하는 그녀. ‘응’하고 말하는 그녀. ‘응 그래’하고 말하는 그.
그들 사이를 오가는 말은 단지 하나의 ‘욕망’밖에 옮기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는 콘택트가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p. 74 사람은 알고 있는 자의 위치에 서 있는 동안은 늘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스승이 스승으로서 기능하는 것은 그가 실증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 그것을 제자에게 전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승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능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능의 효과로서 제자는 종종 스승이 가르치지 않은 것도 배우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의 위대함은 그렇게 제자의 술회를 통해서 사후적으로 검증됩니다.

p. 106 중요한 것은 ‘누구’가 ‘누구’와 대면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면적 상황이 성립하는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봐 온 것처럼대면적 상황이란 ‘나’와 ‘당신’과 같은 두 사람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는 본질에서 ‘삼자협의’이고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제삼자’를 환대하는 장을 의미합니다.

p. 108 제자는 스승을 욕망합니다. 스승이 갖고 있다고 상정된 수수께끼를 욕망합니다. 그리고 제자가 욕망하고 있는 그 수수께끼는 스승 안에 ‘갖고 있다고 상정된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스승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늘 ‘스승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스승을 갖지 않은 독학자가 탈무드를 해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이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것은 독학자가 수수께끼를 ‘복수적 파롤’ 사이에 살게 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학자는 자신의 목소리 하나밖에 모릅니다. 목소리와 목소리가 부딪혀서 어울릴 때 비로소 욕망이 생성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독학자는 모든 것을 기지旣知에 환원하고 텍스트의 의미를남김없이 밝히고 성구에 ‘정답’을 들이대고 해석의 운동을 정지시키고 탈무드에 ‘최종적 해결’을 가져오게 됩니다.

p. 147
파라시오스(Parrhasius)라는 두 화가의 싸움을 비유로 가져옵니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라는 두 명의 화가가 어느 쪽이 보다 실사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그 기술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먼저 제욱시스가 실물과 똑같은 포도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너무나도 사실적이었던 나머지 새가 날아와서 그림의 포도를 쪼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의 솜씨에 만족한 제욱시스는 기세가 등등해져 “자, 자네 차례네”하고 파라시오스를 돌아봅니다.
그런데 파라시오스가 벽에 그린 그림에는 덮개가 씌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욱시스는 “그 덮개를 빨리 걷어 주지 않겠나”하고 재촉하였습니다. 그때 승부는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파라시오스는 벽 위에 ‘덮개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겉보기이고 이 겉보기야말로 겉보기를 겉보기로 존재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입니다.

p. 178 물론 레비나스 자신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간 ‘과부, 고아, 이방인’에 그 어떤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자신도 또한 같은 폭력의 피해자였으니까요. 그는 ‘결백’합니다. 그럼에도 레비나스가 전시 포로로서 독서를 하고 크리스트교도와 우애를 쌓을 기회를 잡는 등 비교적 견디기 쉬운 수용소 생활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의 동포들이 무참한 죽음을 경험한 이상, 레비나스는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p.180 ‘내가 받은 박해(les perséutions que je subis)에 관해서조차도 나는 유책’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레비나스 윤리의 엄청남을 상징하는 말로서 반복해서 인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박해’를 받으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하노버 수용소 사이에 존재했던 격절에 관해서, 그리고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 사이에 존재한 격절에 관해 레비나스 자신이 맛보았을 터인 자책에 관해서 생각한다면 ‘내가 받은 박해에 관해서도 나는 유책이다’라는 레비나스의 말은 결코 사변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신체의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듯 분출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 213 대상적 경험에서 시각의 압도적인 우위성, 레비나스는 그것에 의문을 품습니다. 왜 서구의 지적 전통은 ‘보는 것’에만 고집하고 그것 이외의 지각에는 부차적인 역할밖에 부여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후설의 지향성은 철두철미 시각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지향성의 대상은 본래 표상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지향성은 단지 ‘관상되는 대상’과 ‘표상하는 사유’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정황은 아닙니다. 그런데 ‘비-관상적 대상’ 과 ‘비-표상적 사유’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지향성의 경험의 가능성에 관해서 후설은 거의 배려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