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삼국유사고증 역주 3권
저 자 미시나 아키히 외 / 김정빈 역
발행일 2023-09-20
판 형 신국판(152*225) 양장
ISBN 9791166841903
페이지수 416
정 가 34,000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이 고대 한국의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의 정치·경제·군사적 관계를 역사적으로 모아 기록한 책이다. 나아가 사회·문화·종교·예술·건축의 전반에 걸쳐, 가능한 동아시아 모든 문헌에 의해, 고증의 태도로 편찬한 것이다.
본서는 규장각본(1512)을 비롯한 『삼국유사』 이본(異本), 한국사 DB와, 일본의 ‘삼국유사연구회’의 회원에 의해 저술된, 이미 이 분야의 저명한 책인 『삼국유사고증』과의 비교·대조를 행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三권 목차(삼국유사고증 중)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2>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 _15
만파식적萬波息笛 _51
효소대왕 죽지랑孝昭大王 竹旨郞 _61
성덕왕聖德王 _76
수로부인水路夫人 _82
효성(성덕)왕孝成(聖德)王 _89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_93
찬기파랑가왈讃耆婆郎歌曰 _101
혜공왕惠恭王 _107
원성대왕元聖大王 _116
조설早雪 _136
흥덕왕앵무興德王鸚鵡 _141
신무대왕 염장 궁파神武大王 閻長弓巴 _144
사십팔 경문대왕四十八 景文大王 _151
처용랑 망해사處容郎 望海寺 _160
진성여대왕 거타지眞聖女大王 居陁知 _170
효공왕孝恭王 _177
경명왕景明王 _181
경애왕景哀王 _184
김부대왕金傅大王 _187
남부여·전백제南扶餘·前百濟 _231
무왕武王 _248
후백제 견훤後百濟 甄萱 _255
가락국기(1)駕洛國記(1) _326
가락국기(2)駕洛國記(2) _345
가락국기(3)駕洛國記(3) _360
가락국기(4)駕洛國記(4) _385
보유補遺 _399
‘삼국유사해제’ 보유 _407
三品彰英(미시나 아키히데)_ 오사카시립박물관장, 불교대학 교수.
村上四男(무라카미 요시오)_ 와카야마대학 명예교수, 삼국유사연구회 회장.
井上秀雄(이노우에 히데오)_ 쇼인여자단기대학 학장.
笠井倭人(가사이 와진)_ 교토여자대학 강사.
木下札人(기시타 레진)_ 긴기대학 교수.
江畑武(에바타 다케시)_ 한난대학 교수.
中村 完(나카무라 다모쓰)_ 도호쿠대학 문학부 조교수.

김정빈(金正彬)_
히로시마대학대학원 학술박사(교육학), 일본국립시마네대학 연구원. 저서로는 󰡔校正宋本廣韻에 의한 廣韻索引과 韻鏡索引󰡕(한국학술원, 2010) 외 10여 편이 있으며, 역서로는 沼本克明의 󰡔한국인을 위한 일본한자음의 역사󰡕(한국학술원, 2008), 小林芳規의 󰡔각필의 문화사󰡕(한국문화사, 2016) 등이 있다.
‘우리는 과연 『삼국유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삼국유사』는 고대 한국의 파랑(波浪)을 지나, 북국(北國) 고려로의 통합과 재탄생을 그린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구)려인이 되었고, 광활한 대륙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큰 그림을 남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연은 우리에게 과제를 남긴 것이다.
‘나는 일찍이 스승이 만들었다는 기파랑을 찬양한 사뇌가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노래의 풍취는 매우 격조가 높은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사뇌가는 정말 스승이 만드신 것이 틀림없는가?’
충담사가 ‘그러하옵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은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리기 위한 노래를 지어 주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칙명을 받고 충담은 즉시 노래를 지어 이것을 왕에 드렸다. 왕은 이것을 기뻐하여 왕사로 봉하였는데, 충담은 왕에게 정중한 예를 올리며 감사의 뜻을 나타냈지만, 그것을 받는 것을 굳이 사양할 뿐이었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이 부른다. (95면)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이에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원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풍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이후 정사를 도왔다. 이 자식은 이름하여 처용이라고 했는데,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처용에게 시집보내,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도읍의 생활에 잡아 두려고, 한층 더 급간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처용의 처는 유난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병신이 그녀를 흠모한 나머지,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인기척 없는 밤에 살며시 그 집을 찾아가서, 몰래 하룻밤을 함께 보내 버렸다. 바깥에 나갔던 처용이 집에 돌아와 방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추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62면)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 추모왕은,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는데,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이때 부여주의 왕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고, 다만 딸이 세 명 있었을 뿐인데,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주몽은 이윽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비류이고 다음은 온조다. 그러나 (주몽이 북부여에 있었을 때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었기 때문에) 태자가 자기들을 배척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윽고 오간·마려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이때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그리고 부아악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바랐으나,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건대, 이 하남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비옥한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과 지리가 좀처럼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둘로 나누자, 그 하나를 이끌고, 결국 미추홀까지 가서, 그곳에 살았다. (235면)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구간(九干)들은 모두 여러 관리의 으뜸이다. 그런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농부들의 칭호이고, 고관 직위의 칭호가 아니다. 만약 외국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아도를 아궁이라 하고, 여도를 여해, 피도를 피장, 오방을 오상이라 하고,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유덕이라 하였다. 나아가 신천을 신도, 오천을 오능이라 했고, 신귀의 음은 바꾸지 않고 그 뜻을 고쳐 신귀(臣貴)라고 하였다. 또 계림의 직제를 취해서, 각간·아질간·급간의 3관직을 두고, 그 아래의 관료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했다. 이러한 개혁을 한 까닭은,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하여 직무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이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나라도 다스리고 사람들의 집도 정돈되게 되었다.
왕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기 위하여,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3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