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918] 명유학안 역주【1권】
저 자 황종희黃宗羲 / 윤상수·강경현·이봉규
발행일 2023-10-13
판 형 신국판(152*225) 양장
ISBN 9791166842399
페이지수 412
정 가 33,000




황종희가 명대 리학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지은 책이 바로 『명유학안』이다. 전체 유학의 역사에서 명대 리학이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그 명대 리학의 정통이 왕수인, 유종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그러한 명대 유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일은 유종주의 후계자인 자신이야말로 가장 적임자라는 자부심이 황종희로 하여금 이 책을 저술하게 하였다.
명대 리학의 역사를 정리한 책은 이전에도 있었는데, 주여등(周汝登)의 『성학종전(聖學宗傳)과 손기봉(孫奇逢)의 『리학종전(理學宗傳)』을 들 수 있다. 황종희는 이 두 책과는 달리 『명유학안』에서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각 학자의 종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요령 있게 비평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황종희의 자신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명유학안』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사’로 불리거나 ‘명대의 유학을 연구하기 위한 필독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 간행사_ 5
□ 범례_ 16
□ 해 제(윤상수)_ 17


서 序 ·윤상수

정성의 서鄭性序 51
황천추의 발黃千秋跋 54
풍전해의 발馮全垓跋 56
우준의 서于準序 59
구조오의 서仇兆鰲序 63
명유학안서明儒學案序 68
명유학안서(원서)明儒學案序(原序) 74
가윤의 서賈潤序 80
가박의 발賈樸跋 84
가념조의 발賈念祖跋 87
막진의 서莫晉序 89
명유학안발범明儒學案發凡 95


사설 師說 ·윤상수

정학 방효유方正學孝孺 103
월천 조단曹月川端 107
경헌 설선薛敬軒瑄 110
강재 오여필吳康齋與弼 112
잉부 진진성陳剩夫眞晟 116
소천 주혜周小泉蕙 117
백사 진헌장陳白沙獻章 119
극암 진선陳克菴選 122
일봉 나륜羅一峯倫 123
허재 채청蔡虛齋淸 126
양명 왕수인王陽明守仁 128
동곽 추수익鄒東廓守益 133
용계 왕기王龍溪畿 135
정암 나흠순羅整菴欽順 139
경야 여남呂涇野柟 147
운포 맹화리·아강 맹추·양화 장원변 孟雲浦化鯉·孟我疆秋·張陽和元忭 149
염암 나홍선·대주 조정길·당남 왕시괴·정우 등이찬 羅念菴洪先·趙大洲貞吉·王塘南時槐·鄧定宇以讚 152
근계 나여방羅近溪汝芳 155
견라 이재李見羅材 157
경암 허부원許敬菴孚遠 159


명유학안 권1, 숭인학안 1 明儒學案 卷一, 崇仁學案一 ·강경현

빙군 강재 오여필 선생聘君吳康齋先生與弼 163


명유학안 권2, 숭인학안 2 明儒學案 卷二, 崇仁學案二 ·윤상수

문경 경재 호거인 선생文敬胡敬齋先生居仁 217
교유 일재 누량 선생敎諭婁一齋先生諒 274
서산 사복 선생謝西山先生復 282
공명 정항 선생鄭孔明先生伉 284
봉의 호구소 선생胡鳳儀先生九韶 286


명유학안 권3, 숭인학안 3 明儒學案 卷三, 崇仁學案三 ·이봉규

공간 장거 위교 선생恭簡魏莊渠先生校 291
시랑 인재 여우 선생侍郞余訒齋先生祐 347


명유학안 권4, 숭인학안 4 明儒學案 卷四, 崇仁學案四 ·이봉규

태복 동암 하상박 선생太僕夏東巖先生尙朴 355
광문 옥재 반윤 선생廣文潘玉齋先生潤 395


□ 인명·개념어·서명/편명 색인_ 397
황종희(黃宗羲, 1610~1695)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자이다. 자는 태충(太沖), 호는 남뢰(南雷) 또는 이주(梨洲)이며,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 사람으로 동림파(東林派) 관료였던 황존소(黃尊素)의 아들이다.
청년 시절 동림의 후예이자 복사(復社)의 명사로서 활약하며 정치 운동에도 참가하였고, 청(淸)나라 군대가 남하하자 의용군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명조(明朝) 회복의 희망이 사라진 뒤에는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며 청조(淸朝)의 부름을 거절하고 명(明)의 유로(遺老)로서 일생을 마쳤다.
스승인 유종주(劉宗周)를 통해 양명학(陽明學)의 온건한 측면을 계승하고 관념적인 심학(心學)의 횡류(橫流)를 비판하였으며, 경세(經世)를 위한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제창하여 청대 고증학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저술로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유학안(明儒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등 다수가 있다.


_역주자

윤상수(尹相洙)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인하대학교에서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송대(宋代) 이후의 유학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 「科挙の学から経史の学へ—黄宗羲からみた明末清初の学術転換の一様相—」(박사논문, 2011), 「거업(擧業)을 통해 본 명말(明末)의 과거와 학문」(2011), 「청대 고증학의 개조 황종희」(2012), 「『명유학안(明儒學案)』의 양명학관(陽明學觀) 재고」(2012), 「전후 일본의 송명유학 연구에 대하여」(2017) 등이 있다.

강경현(姜卿顯)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유가철학이다. 논문으로 「퇴계 이황의 리(理)에 대한 해석의 갈래」(2017), 「조선시대 『명유학안』 독해 양상과 그 성격」(2017), 「조선시대 經筵에서 『尙書』 강독의 의미」(2022) 등이 있고, 저서로 『퇴계 이황의 리(理) 철학: 지선(至善) 실현과 자기완성』(2022)이 있다.

이봉규(李俸珪)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조선시대 성리학, 예학, 실학이다. 논문으로 「조선시대 유학연구 재독」(2003), 「실학의 유교사적 맥락과 유교 연구 탐색」(2015), 「이황의 『가례』 연구와 전승」(2020), 「발전사의 시야에서 본 이이의 이(理)개념」(2021) 등이 있고, 공저로 『조선시대 충청지역의 예학과 교육』(2001), 『다산 정약용 연구』(2012), 『풍석 서유구 연구 하』(2015), 『서학의 충격과 접변』(2019), 『밀암 이재 문파 연구』(2021) 등이 있다. 역서로 『정체전중변』(공역)(1995), 『역주시경강의』(공역)(2010), 『의례역주8』(공역)(2015), 『역주예기천견록5』(2021), 『상서고훈』(공역)(2021) 등이 있다.
황종희는 명말청초의 혼란한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살았던 실천적 사상가이자 사상사가思想史家이다. ‘경세를 위한 경사지학經史之學’을 지향했던 그는 망국의 한을 학문 탐구로 승화시켰다. 미래의 정치사상을 담은 『명이대방록』을 저술함과 아울러 과거 명대의 학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을 했다. 그 작업의 성과물이 바로 『명유학안』이다. 그것은 중국 최초의 학술사이자, 명대 유학 연구의 필독서로 평가받고 있다.
명대 유학의 주요 특징은 ‘내 마음[吾心]’에서의 ‘자득自得’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내 마음’의 공부이기 때문에 문호에 기대거나 남을 모방하지 않고 자기의 고유한 형체와 정신을 발휘한다. 학문을 통해 일가一家를 이룬 이들이 자신이 터득한 공부법을 간명하게 요약한 것이 ‘종지宗旨’이다. 종지는 그의 공부가 힘을 얻은 득력처得力處이자, 후학을 학문의 세계로 이끄는 입문처入門處이기도 하다.
유학자들은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고자 한다. 명대 유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인의 마음을 본래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그것이 바로 ‘본심本心’이다. 본심대로 살려고 몸과 마음을 다해 애쓰는 것이 ‘공부’이고, 공부를 통해 도달한 지평이 바로 ‘경지’이다. 그런데 공부를 통해 도달한 경지는 다름 아니라 본심이 실현된 것이다. 황종희는 이것을 가리켜 “마음에 본체가 없고, 공부가 도달한 곳이 바로 그 본체이다[心無本體, 功夫所至, 卽其本體.(明儒學案原序)]”라고 말한다. 공부법과 그 경로는 달라도 도달한 궁극적 지평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명대 유학을 바라보는 황종희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명대 유자들마다 그 학문 ‘종지’는 다르지만, 그들이 도달한 지평은 동일하다. 이런 시각에서 황종희는 명유들이 각자 힘을 써서 터득한 학문 종지를 밝히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종지’를 기준으로 문파를 구분하고, 동일 문파에서 그 근원과 지류를 구별하여 동일한 ‘종지’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드러낸다. 또 각 학자들의 사상이 담긴 주요 자료들을 뽑아 수록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사상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황종희가 한 것은 여기까지다.
황종희는 『명유학안』을 사통팔달의 대로에 놓인 술동이에 비유한다. 그 안에 담긴 술을 맛보고 음미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명유들이 제시한 가르침을 음미하고 참조하여 자신에게 적절한 공부법을 찾아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착실하게 자기를 가꾸는 공부를 하다 보면 자사自私와 물욕物欲이 탈각된 지점에서 자기 마음의 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_간행사 中
오여필吳與弼은 자가 자부子傅이고 호는 강재康齋이며 무주撫州의 숭인崇仁 사람이다. 부친은 국자사업國子司業 오부吳溥이다. 선생이 태어날 때 조부의 꿈에서 선조의 묘에 등나무가 얽혀 있는데 한 노인이 그것을 가리켜 반원扳轅의 등나무라고 하였으므로, 초명은 몽상夢祥이었다. 8~9세에 이미 기개를 자부하였다. 19세에【영락연간 기축년(1409)이다.】 도성【금릉金陵이다.】에서 부친을 뵈었다. 세마洗馬 문정文定 양부楊溥를 따라 배우며 『이락연원록』을 읽고는 개연히 도에 뜻을 두고 말하기를 “정백순程伯淳(明道 程顥)도 사냥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이 들었으니, 곧 성현도 보통 사람이나 마찬가지임을 알겠다. 누가 배워서 이를 수 없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_164면

제학提學 이령李齡과 종성鍾城이 연달아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맡아 달라고 청하였고, 제생諸生도 귀계貴溪의 동원서원桐源書院에서 강학해 달라고 청하였다. 회왕淮王이 그의 소문을 듣고 왕부王府에서 『역易』을 강의해 달라고 청하였다. 왕이 그의 시문을 출판하려 하자 선생은 사양하면서 “아직 조금 더 진보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근엄하고 굳세고 청빈하였으며, 매사에 법도를 따랐다. 매일매일 반드시 공부의 계획을 세우고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스스로 반성하였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자세하게 구별하여 죽을 때까지 뒤섞어 놓고 같이 사용하지 않았다. _218면
거업록
“고요한 가운데에 무언가가 있다[靜中有物].”는 것은 단지 언제나 잡아서 지키고 주재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니, (이것을 안다면) 공허하고 적막하거나 어둡고 막힐 근심이 없을 것이다.
마음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래도 좋은 일이다. 곧바로 일깨우고 수렴하여 다시 도망가지 않게 (하면 되니, 이것이) 바로 경을 위주로 하여 마음을 보존하는[主敬存心] 공부이다. 만약 마음을 둘 곳을 모른다면 망막하고 아득할 것이니, 이렇다면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
_216면

경태景泰 계유년(4년, 1453)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물러나서 10여 년간 공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회시會試를 보러 상경하였으나 항주杭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다음 해인 천순天順 갑신년(8년, 1464)에 다시 상경하였는데 을방乙榜에 올라 성도成都 부학府學의 훈도訓導가 되었다. 얼마 뒤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글을 쓰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저서로는 『일록日錄』 40권이 있는데 말이 질박하고 리理가 순수하여 구차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지 않았다. _276면

하상박夏尙朴의 자는 돈부敦夫이고, 별호는 동암東巖이다. 영풍(永豊: 현재 江西 吉安市 永豐縣) 출신이다. 일재一齋 누량婁諒에게 배웠다. 정덕正德 신미(1511)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육부六部의 속관, 혜주부지부惠州府知府, 산동제학부사山東提學副使 등을 역임하고, 남경태복소경南京太僕少卿에 이르렀다. 유근劉瑾이 정사를 전횡하자 귀향하였다. 왕문성(王文成: 王守仁)이 전별한 시에 “슬瑟을 내려놓고 봄바람 쐬는 것이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하 선생이 “공자 학단이 기수沂水에서 봄바람을 쐬는 풍경은 순의 조정에서 공경하고 삼가던 정리情理에서 떠나 있지 않다.”라고 답하였다. 선생은 경敬을 중시하는 학문을 전하였는데, “마음을 깨어 있게 하면 곧 천리이고 마음을 놓아 버리면 곧 인욕이다.”라고 하였다. 장거莊渠 위교魏校가 지극히 타당한 말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러나 “상산(象山: 陸九淵)의 학문은 정신을 수렴하는 것을 위주로 삼는데, 우리 유자가 정신을 수렴하는 것은 여러 도리를 밝게 알아 응대하려는 것이지, 단순히 수렴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결국 마음을 깨어 있게 하는 것 또한 반드시 천리인 것은 아니게 되니, 스스로 자신의 설과 어긋나지 않는가? 대개 선생은 심心과 리理를 다른 것으로 여겨서 심心은 리理를 궁구하는 것이고, 리를 다 행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양명이 “마음이 곧 리이다.”라는 한마디를 내놓았을 때, 심오한 말로 여기지 않았으니 어찌 이상하겠는가? _3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