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8)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저 자 김명자
발행일 2023-11-20
판 형 140*200
ISBN 9791166842672
페이지수 228
정 가 16,500




※ 전통생활사총서
한국 전통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현장과 인물 속에 숨어 있는 사례들을 하나하나 발굴하여 재구성해 소개한다. 당시 사람들의 일상 속을 세밀하게 파악해서 그간 덜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소재를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달한다. 특히 중앙정부 중심의 자료가 아닌 민간에서 생산한 기록물을 통해 재현하는 만큼 각 지역의 살아 있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매년 해당 분야 전문가를 집필자로 선정하였고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원고의 완성도를 높였다. 본 총서를 통해 생활사, 미시사, 신문화사의 붐이 다시 일어나길 기대한다.
책머리에 4
들어가는 말 11
1. 최흥원, 일기로 들여다보다 17
50여 년의 일상, 책력에 기록 19
퇴계학파로서의 정체성 확립 24
아내의 빈자리, 첩을 들여야 하나? 28
최흥원의 조력자들 33
학자와 지주 사이에서 41
2. 집안 경영, 나눔과 정성에 기반하다 47
나눔과 호혜의 일상생활 49
손님 접대에 쏟는 정성 57
3. 재산 관리, 꼼꼼한 경영자를 자처하다 61
백여 명의 ‘식구’를 먹여 살려야 63
한 해의 먹거리, 농사 관리 68
노비의 감독과 물건을 바치는 사람들 74
살림에 보탬이 되는 선물과 부조 80
4. 제사 지내기, 사제의 역할에 충실하다 83
종손의 지위 확립 85
제사의 실행 89
제사 예법, 원칙과 시속 사이의 고민 95
제수의 마련과 감독 97
5. 혼인, 집의 격을 높이는 데 기여하다 101
아들 주진의 혼인 105
사촌 아우 흥부의 혼인 110
조카 사진과 상진의 혼인 112
혼인 성씨들과의 교유 117
6. 자녀 교육, 최고의 매니저였다 123
애틋한 아들과 손자의 공부 126
아우들 공부 모임 만들어 주기 133
두 조카, 매질로 가르치다 135
영남 최고의 교사진 확보 138
동화사와 부인사, 또 하나의 학교 143
과거 응시, 기대하고 또 기대하고 148
책을 빌리고 빌려주고 153
7. 생필품 마련, 시장 곳곳에 사람을 보내다 159
어머니 밥상에 올릴 반찬거리 161
장사꾼 물건 중에는 도둑맞은 것도 있거늘 165
구입 대행과 심심찮은 중고 거래 169
8. 의학지식, 가족을 질병에서 구하다 173
평생 지속된 어머니의 병환 175
아내와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179
최흥원의 의학 지식과 질병 치료 182
대구부 의국과 의원의 도움 192
9. 전염병의 급습, 지혜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다 199
3-4년에 한 번은 급습하는 전염병 201
최흥원의 전염병 예방 매뉴얼 206
전염병을 뚫고 치른 혼례 211
천연두로 생사를 넘나드는 둘째 아우 213
나오는 말 218
주석 222
참고문헌 226
기 획 한국국학진흥원(박경환, 김형수, 나영훈, 이규호, 조인희)
한국국학진흥원은 ‘국학진흥을 통한 글로컬시대의 인류문화 창달에 기여’라는 목표 아래 전통 기록유산을 중심으로 민간 소장 국학 자료의 체계적인 수집 보존과 연구 활용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학전문연구기관입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전통시대 고문서와 유교 목판 등의 기록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으며, 그런 기록유산들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한국적 스토리텔링 소재를 발굴하여 콘텐츠 제작 현장에 제공하는 일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을 통해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 선현들의 지혜를 전승하고, 한문교육원과 유교문화박물관을 운영함으로써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급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 자 김명자
경북대학교 사학과 외래교수
안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안동 하회의 풍산 류씨 문중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일기자료를 통해 생활사 및 지역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 하와일록-소년에서 유학자로, 조선 사대부 청소년의 성장 과정과 세상 읽기』(공저), 『Collect and Preserve-Institutional Contexts of Epistemic Knowledge in Pre-modern Societies』(공저), 「대산 이상정(1711~1781)의 학문공동체 형성과 그 확대-《大
山日記》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 기록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상인이 남긴 일기도 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남긴 마을의 이야기도 있어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의 변두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p. 28
최흥원은 집을 경영하는 데 안살림을 책임져 줄 아내가 일찍 사망했지만, 재혼하지 않아 애로사항이 많았다. 아내가 사망한 다음 해인 1741년 1월 1일 새해에 가장 먼저 떠오른 심상은 아내 없이 홀아비가 된 자신의 처지였다. 그는 새해를 맞이하니 홀아비의 심정이 즐겁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3월 13일은 둘째 아들의 생일이었는데, 낳은 어미가 있지 않으니 참으로 슬프다고 했다. 아내가 죽은 이후 최흥원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일기 곳곳에 묻어났다

p. 71-73
최흥원은 직접 농사를 관리 감독했다. 농사철에는 파종과 추수로 바빴다. 종들에게 밭에 보리를 파종하도록 했는데, 파종 시기가 늦어 싹이 날까 걱정했고, 해안의 보리타작을 위해 종 10여 명을 보내기도 했으며, 계집종들에게도 모내기, 김매기, 가을걷이, 보리타작 등을 시켰다. 종 상만을 강각동에 보내어 거둔 모초로 재를 만들게 하여 가을갈이에 대비하도록 했다. 매일 밭갈이와 곡식 수확을 점검하느라 바쁘게 쫓아다니니,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한탄스럽기도 했으며, 날마다 생업에 대처하고 힘을 쓰느라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논과 밭이 여러 곳에 있어서 최흥원이 일일이 관리하거나 감독할 수 없었다. 아우를 비롯하여 아들 주진, 사촌 통숙과 문희 등에게 파종과 타작을 감독하게 했고, 그들은 최흥원에게 작업 결과를 보고했다.

p. 127
최흥원은 다시 조선적에게 공부하러 간 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11월 21일에 주진이 오한과 발열 증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걱정되었다. 12월 10일에 종이 열 몇 장과 오미자를 아들에게 보냈다. 12월 28일, 아들이 계속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걱정이 멈추질 않았다. 그 사이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주진은 1738년 10월 1일에 조선적의 집에서 돌아왔다. 아들과의 오랜만의 상봉에 최흥원의 마음은 매우 설렜다. 아들의 모습을 보니 의젓하게 자라서 위로가 되었으나, 학습에는 진전이 없는 듯하여 다소 실망스럽고 답답한 심정이었다.

p. 163-164
1742년 12월 26에는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구하기가 어려워, 어머니의 입에 맞는 것으로 얻은 것이라고는 단지 반쯤 말린 대구와 청어 같은 것뿐이었다. “옛사람들이 어버이를 봉양할 때는 몸을 편히 해 드리고 입에 맞는 것을 모두 갖추어 드렸는데, 나는 이 무슨 성의란 말인가?”라고 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1744년 4월 27일에도 어머니의 반찬거리가 마땅하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차에 유산의 아내가 꿩 한 마리를 구해 바쳤다. 보리를 주고 사서 병환 중의 어머니에게 올렸다. 최흥원은 어머니 밥상에 올릴 쌀도 광동에 있는 기름진 논에 따로 재배했다. 최흥원은 아내가 없었기 때문에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머니의 반찬에 더욱 신경을 쓴 부분이 있지만, 아내가 있다 할지라도 어머니의 식사만큼은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최흥원이 효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p. 182
6월 22일 오전에 관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최흥원은 곧바로 염을 하여 부인 묘 옆에다 아들을 묻은 뒤 통곡하고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손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비통해하니, 장차 병이 생길 것 같아 걱정되었다. 이 모든 것을 본인이 불효하여 부른 재앙으로 여겼으므로, 죄스러워 눈물만 흘렸다. 6월 26일에 남가(南哥) 아이가 왔기에자식 잃은 슬픔을 말하며 절구 한 수를 짓도록 했다. 그는 곧바로 시를 지어 주었다. 상심해 있는 본인을 위해 어린아이가 지어 준 시를 최흥원은 일기 한편에 적었다. 최흥원은 아내와 어린 자식을 연달아 잃은 아픔을 품고 삶을 견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