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10) 조선시대 농민들의 농사짓기
저 자 염정섭
발행일 2023-11-20
판 형 140*200
ISBN 9791166842696
페이지수 188
정 가 14,500




※ 전통생활사총서
한국 전통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현장과 인물 속에 숨어 있는 사례들을 하나하나 발굴하여 재구성해 소개한다. 당시 사람들의 일상 속을 세밀하게 파악해서 그간 덜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소재를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달한다. 특히 중앙정부 중심의 자료가 아닌 민간에서 생산한 기록물을 통해 재현하는 만큼 각 지역의 살아 있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매년 해당 분야 전문가를 집필자로 선정하였고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원고의 완성도를 높였다. 본 총서를 통해 생활사, 미시사, 신문화사의 붐이 다시 일어나길 기대한다.


“ 조선의 농사 문화 속에 담긴, 민족의 역사와 정신”

황희와 노농의 일화에서 역사는 유명한 사람들의 힘, 이른바 영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설화에 나오는 노농과 같은 사람들의 자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노농의 자취를 나아가서 농민의 삶을 제대로 복원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모든 농업생산활동을 책임지고 수행한 사람이 바로 농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고 한다면,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자취를 복원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기르는 과정이 바로 역사인 것이다. 우리가 농민의 삶을 대체적으로나마 재구성하고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해서 설명하는 것은 바로 농민이 가진 역사적인 의미를 되살리려는 것이다.
책머리에 4
1. 조선시대 농사짓기의 원형 찾기 9
2. 논밭 일구어 마련하기-개간과 간척 19
3. 작물 재배 기술의 전개 양상 39
4. 시비 기술의 지역적 특색 67
5. 농민들이 활용한 농기구 83
6. 물을 다스리는 기술과 도구들 101
7. 자연재해의 대비와 극복 133
8. 농민들의 농사짓기와 역사 발전 159
주석 179
기 획 한국국학진흥원(박경환, 김형수, 나영훈, 이규호, 조인희)
한국국학진흥원은 ‘국학진흥을 통한 글로컬시대의 인류문화 창달에 기여’라는 목표 아래 전통 기록유산을 중심으로 민간 소장 국학 자료의 체계적인 수집 보존과 연구 활용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학전문연구기관입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전통시대 고문서와 유교 목판 등의 기록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으며, 그런 기록유산들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한국적 스토리텔링 소재를 발굴하여 콘텐츠 제작 현장에 제공하는 일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을 통해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 선현들의 지혜를 전승하고, 한문교육원과 유교문화박물관을 운영함으로써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급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 자 염정섭
한림대학교 사학전공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농서 편찬과 농법의 발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농업기술의 발달, 농서 편찬의 추이, 농정책의 실시, 양전 시행과 양안 작성, 궁방전의 형성과 변동, 농기구의 변화,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 농업개혁론의 전개 등을 연구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는 『조선 시대 농법 발달 연구』,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3: 조선시대』(공저), 『18~19세기 농정책의 시행과 농업개혁론』, 『농업기술과 한국문명』(공저)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근간, 농사짓기를 통해 조선을 살피다”
조선의 경제의 기반은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농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조선의 다양한 정책들은 농업과 관련되 있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농업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조선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할 만하다. 다만 조선의 농업의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을 생활사적인 측면에서 살핀 책이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본 책은 농민들의 농업생활을 소개하기를, 농민들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것일지는 몰라도 그 개개의 활동이 결국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활동으로 소개한다. 조선시대의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가 오히려 노농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 주듯, 조선의 역사는 결국 한 명의 영웅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수히 많으나 알려지지 않은 농민들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기에 앞서 농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선 농업의 구체적인 모습, 농민들의 삶, 농업을 위해 시행되었던 조선의 정책 등 농업의 다양한 면모를 다각적인 모습에서 살피는 일은 조선의 근간으로부터 조선의 전반을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에게 ‘조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양반이나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양반과 선비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양반들의 삶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민들의 삶도 함께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국가 기록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개인의 일기나 서간집 등 다양한 사적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일기나 서간집을 남긴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한계는 있지만, 상인이 남긴 일기도 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남긴 마을의 이야기도 있어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주변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생활사총서는 이처럼 조선의 변두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들을 따라서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람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p. 30
정조를 비롯한 조선시대 중앙정부가 수행한 권농정책의 한 방향은 한광지와 진전의 개간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농경지의 확대가 17세기에서 18세기 무렵에 확연히 확인되는데, 이 가운데 특히 수전의 증대가 남다른 것이었다. 정조는 개간의 장려를 위해 역대 조정이 마련한 여러 가지 시책을 계승하여 수령에게 개간을 독려하고, 개간지에 대해 몇 해 동안 면세 조처를 취하고, 나아가 개간자에게 시상을 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중반까지 조정에서 수행하였던 개간에 대한 시책이 정조대에도 준행되었다.

p. 48-49
한전(旱田)을 기경하는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전 기경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경지는 천천히 하는 것이 적당하다. 천천히 하면 흙이 연해지고, 소가 피곤하지 않게 된다. 춘하경(春夏耕)은 얕게 하는 것이 적당하고, 추경(秋耕)은 깊게 하는 것이 적당하다”라는 것을 『농사직설』에서 제시하고 있었다. 봄·여름갈이는 얕게 하고, 가을갈이는 깊게 하라는 것은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농서에 등장하는 기경의 원칙이었다. 봄작물, 가을작물에 연결되는 기경 작업에 얕고 깊은 차별을 두어서 갈기의 깊이를 각각 규정한 것은 봄철과 가을철의 토양의 조건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었다.

p. 87
『농사직설』의 수확용 농기구는 낫이었다. 미리 풀을 베어 시비재료를 만들도록 권장할 때 등장하는 농기구도 자루가 긴 낫이었다. 낫을 수확 작업뿐 아니라 산야의 초목을 베어 내는 작업에 이용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관행이었다. 낫으로 작물을 수확한 다음 이렇게 획득한 작물을 사람이 식용(食用)으로 이용하려면 몇 단계 작업을 더 거쳐야만 했다. 농사일의 고단함은 이렇듯 땅을 기경하는 순간부터 수확한 이후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농민의 수고로움이 곡식의 한 알 한 알에 배지 않을 수 없었다.

p. 104
계곡이나 평지의 높은 곳은 막아서 계곡물이나 빗물을 모아 저장하였다가 농사에 이용하는 제언(堤堰)이나 하천을 가로막아 하천물을 이용하는 천방(川防, 洑)을 주된 수리시설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바닷가나 하천 연안의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 물이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언(堰)도 축조되었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용하던 수차(水車)를 도입하여 제작하고 보급하는 일도 여러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p. 138
자연재해의 발생원인에 대해서 지구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당시에 자연재해는 하늘이 내려 준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연재해를 하늘의 경고, 경계 등으로 파악할 때 결국 하늘을 움직이게 만든 인사(人事)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수해와 한해 등 자연재해의 발생 원인은 천수(天數)가 아닌 인사로 간주되고 있었다. 자연재해를 사람의 잘못된 행위와 이에 대한 하늘의 견책 등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은 또한 천변지이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천변지이에 대한 인식은 좀 더 유교적인 이념과 관련된 것이고 군주와 신하 사이의 관계를 포함한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