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도서
세기의 두 지식인, 사르트르와 아롱
저 자 장 프랑수아 시리넬리 지음 / 변광배
발행일 2023-01-02
판 형 신국판
ISBN 9791166841408
페이지수 612
정 가 32,000




‘역사’를 껴안기로 선택한 두 지식인,
그리고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그들의 엇갈린 운명


으레 그러하듯 우리의 이야기는 71년 전에 찍힌 누렇게 바랜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다. 1924년도 고등사범학교 입학생들이 후세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맨 앞줄에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두 명의 젊은이가 나란히 있다. 장폴 사르트르와 레몽 아롱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 뒤로 몇십 년이 흘러 1980년 4월에 사르트르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롱은 다정하면서도 심심한 애도를 표하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참여는 이미 유효하지 않다.” 아롱의 펜 끝에서 나온 이 문장은 과거에 대한 과민반응이나 상처를 곱씹는 것보다는 오히려 ‘역사’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골이 파여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르트르와 아롱은 정확히 같은 나이였고, 친구였다. 게다가 두 사람은 같은 지식인의 토양에서 태어났다. 그런 만큼 20세기를 지나온 그들 각자의 지적 여정의 역사를 비교하는 것은, 단지 깨져 버린 우정의 관계뿐만 아니라, 또한 지식인들의 사회를 요동치게 만들었던 거대한 파도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명의 “절친”인 사르트르와 아롱은 지식인 사회에서 보면 여전히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그 역할이 바뀐 상태이다.

※ 오퍼스(OPUS) 총서
‘Opus’는 보통 약자(Op.)를 사용하여 음악작품들을 손쉽게 나열하여 표현하는 말로, “작가나 화가 등의 중요한 작품”이라는 뜻을 함께 지닙니다. Opus가 간단한 표기만으로 수많은 음악을 담듯, 오퍼스 총서는 멀게만 느껴지는 오늘날의 지식인들과 그 작품들을 담아 우리의 곁에 가까이 닿을 수 있도록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간 예정
• 미학에 고하는 작별_장 마리 셰퍼 지음, 손지민 옮김
• 변화의 천사_잉그리트 리델 지음, 조정옥 옮김
• 언어의 감옥_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_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한승완 옮김
• 상상적 마르크스주의_레몽 아롱 지음, 변광배 옮김
한국어판을 위한 저자 서문

서론 천국과 지옥 사이


제1부 분화구 속의 역사

프롤로그 태초에 카뉴들이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바칼로레아 합격자들
사르트르: 도시의 소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제1장 “고등사범”, 또는 순진함의 시기
두 명의 비전형적인 고등사범학교 학생
뛰어난 철학도들
1차 세계대전을 모면한 세대
“나는 열렬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R. 아롱)
사르트르, 또는 초연의 시기
미래의 지식인들

제1부의 결론 뒷걸음질하면서 ‘역사’에 탑승하기


제2부 폭풍우 속의 세대

제2장 ‘역사’의 깨어남
사회주의화되는 젊은 지식인
독일: “역사는 반복된다”
베를린에서의 “휴가”
프랑스 안에서의 파시즘 위험?
한 사람은 투표하고, 다른 사람은 투표하지 않다
아롱: ‘역사’의 지평에서의 “재앙”
전쟁, 삶의 중간에서

제3장 세계대전 동안의 두 지식인
사르트르: “심각한 변화”
아롱: 전차 아니면 펜?
평온한 점령 기간?
『코뫼디아』, 또는 『레 레트르 프랑세즈』?
과오?
세대 내에서의 릴레이
시련


제3부 30년 전쟁

제4장 대지진
“아롱”의 구상, 자유주의 지식인
사르트르의 권력 장악
위상의 변화
철학의 축전
사르트르의 영광
“이별”을 향하여
경계선상의 우정
귀환 불가능한 지점을 향하여
“각자 자기 진영에서 출발했다”

제5장 냉전의 한복판에서
결렬
풀턴 연설의 효과
냉전 중의 파리에서
“더러운 손을 가진 자는 사르트르이다”
중립주의에서 동반자로
1952년 여름
냉전 기간 중에

제6장 알제리에서 베트남까지
“공산주의자들과의 일치”
1956년의 충격
“알제리 비극”에 대한 하나의 “대답”
사르트르의 전쟁
제3세계, 새로운 혁명적 엘도라도
1968년의 정면 충돌
베트남이라는 기호 아래에서


에필로그

제7장 인상, 저무는 태양
‘역사’가 방향을 바꾸다
꺼져 버린 화산
“선거, 어리석은 함정!”
원로 자유주의자의 가을

결론 20세기에 지식인들은 없었는가?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지 은 이 장 프랑수아 시리넬리

1949년 파리에서 태어나 역사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릴대학 교수를 거쳐 파리정치대학(Institut d’études politiques de Paris)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파리정치대학 명예교수이다. 그는 특히 20세기 프랑스 지성사, 정치사상사, 대중문화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지식인 세대. 양차 대전 사이의 카뉴와 고등사범학교 졸업생들(Génération intellectuelle. Khâgneux et normaliens dans l ’entre-deux-guerres)』(1988), 『프랑스 지식인들 및 열정: 20세기의 선언과 청원(Intellectuels et passions françaises: manifestes et pétitions au XXe siècle)』(1990) 등이 있으며, 『프랑스 우파의 역사(Histoire des droites en France)』(1992) 등의 편찬을 책임 감수했다. 2012년에는 그동안의 학문적 공로로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파스칼 오리(Pascal Ory)와 함께 출간한 Les Intellectuels en France: De l ’affaire Dreyfus à nos jours가 『지식인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옮 긴 이 변 광 배

한국외국어대학 불어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프랑스 몽펠리에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 미네르바 교양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프랑스 인문학 연구모임 ‘시지프’를 이끌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제2의 성》: 여성학 백과사전』,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읽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지식인의 아편』, 『자살: 사회학적 연구』,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사르트르 평전』, 『레비나스 평전』, 『마르셀 모스 평전』,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카뮈: 우정과 투쟁』 등이 있다.
같은 세대를 살았고 자신이 살던 세기를 갈라놓은 두 지식인의 일대기를 살펴보는 일은 곧 그 세기의 지적 흐름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것도 그 두 명의 지식인이 같은 지적 환경에서 자랐고, 과거에 친밀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면 더욱더 그렇다. 여기, 그러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 지성계의 두 거물, 아롱과 사르트르는 처음에는 ‘절친’이었고 나중에는 정적이었다. 고등사범학교라는 지적 온실에서 만난 이 두 절친은 왜 정적이 되어야만 했을까? ‘역사’가 그들에게 선택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더 명확히 말해, 그들에게는 선택이 일종의 의무로서 부과되었다. ‘역사’의 갈림길 앞에 서서, 옳은 것(le bien)을 추구했던 사르트르는 왼쪽으로 걸었고, 진실된 것(le vrai)을 추구했던 아롱은 오른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두 절친의 관계는 결국 회복될 수 없는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 두 지식인과 유사한 관계를 한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그들이다. 같은 학문적 요람에서 배운 두 ‘절친’ 중 먼저 독일에 자리를 잡았던 아롱이 사르트르에게 후설을 추천했듯이, 이색이라는 스승의 문하에서 배운 두 ‘절친’ 중 먼저 인정받았던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맹자를 추천했다. 그리고 왼쪽을 향했던 아롱이 나중에는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것처럼, 개혁을 바라보던 정몽주는 왕조의 위기 앞에서 오른쪽으로 향했다. 반면에 ‘역사’에 유혹되지 않았던 젊은 사르트르는 왼쪽으로 향했고, ‘역사’를 유혹할 수 없었던 젊은 정도전은 ‘역사’를 손에 쥐었다. 그렇게 역사는 두 친구 중 나중에 움직이기 시작한 친구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 가까이에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러한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충(忠)을 중요시하던 조선 지성계에서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이 되었고, 프랑스 지성계에서는 아롱이 걸었던 길이 오른쪽이었을 뿐 아니라, 옳은 쪽이기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사르트르의 옹호자였던 『리베라시옹』의 아래와 같은 기사 제목이 그러한 흐름을 잘 보여 준다. 「슬프다! 레몽 아롱이 옳았다(Raymond Aron avait raison. Hélas!)」. “사르트르와 함께 틀리는 것이 아롱과 같이 옳은 것보다 낫다(Plutôt avoir tort avec Sartre que raison avec Aron)”던 전 세기의 외침이 침묵 속에 침잠되는 순간이었다. 두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반전된 것이다. 이러한 평가의 반전에는 ‘역사’의 움직임이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역사’의 영향을 받은 두 지식인은 역사에 영향을 끼쳤고, 다시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두 지식인의 길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길 중 어느 쪽이 옳았는가에 대해서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처럼, 아롱과 사르트르 중 누가 옳았는가에 대해서 쉽게 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이 시도하는 것 역시 누가 옳았는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둘의 이야기를 종합하려 애쓰는 것이며, 이 책이 시도하는 것 역시 그러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누가 옳았는지 밝힐 수 없음에도 그 둘의 이야기를 종합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어느 때에 누가 옳은 것으로 판정되었는가의 문제는 곧 그 세기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치 혁명을 중요시했던 조선의 건국기와 충절을 중요시했던 건국 이후의 시대처럼 말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르트르의 몰락과 아롱의 상승이 최근의 프랑스 지성계에 매력적이었던가?”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 “왜 금세기는 사르트르가 아닌 아롱을 옳다고 보고 있는가?” 두 지식인이 끌어안고자 한 ‘역사’가 그것을 말해 줄 것이다. 두 명의 ‘지식인’인 사르트르와 아롱은 지식인 사회에서 보면 여전히 ‘역사’의 ‘재판정’ 앞에 서 있다. 다만 이번에는 그 판결이 미뤄진 상태이다.
프랑스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제도가 있다. 카뉴가 그것이다. 윌름가에 위치한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 준비반인 카뉴는 20세기 내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젊은 지식인들의 형성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_프롤로그 태초에 카뉴들이 있었다

시험 주제라는 사소한 징표에서 출발해서 큰 차이점을 예견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교수자격시험의 필기시험에서까지 아주 교활한 모습을 보여 준다. 두 사람이 학업 과정에서 보여 준 모습에 걸맞게 시험 준비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시기에, 아롱은 ‘이성과 사회’라는 주제에 대해 사색할 때 최고로 빛났던 반면, 사르트르는 필기시험 성적에서 일시적으론 심연으로의 추락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다음 해에 사르트르는 ‘자유’라는 주제로 다시 정상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이다.
_제1장 “고등사범”, 또는 순진함의 시기

‘역사’가 다시 움직이던 시기에 이런 재가동의 진원지를 이루고 있던 것은 바로 독일에서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첫 번째 진동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 진동이 발생한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르트르는 그의 발밑에서 일어난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불명예의 요소도 아니고 책임을 져야 하는 요소도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가에게는 전망이 부과된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11년 후에 참여의 의무에 대한 사르트르의 첫 번째 텍스트가 출간되기 때문이다. 이 첫 번째 텍스트는 그 이후에 여러 세대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프랑스 이데올로기의 풍경을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_제2장 ‘역사’의 깨어남

따라서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즉, 비록 이 장의 제사에서 사용된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이 아롱의 삶에서 그 어떤 것과도 유사하지 않고, 또 그의 삶의 흐름을 바꿔 버린 “경험”이었다고 해도, 이 전쟁은 그의 지적 변화에서 그저 가속기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평가의 대상이 된 텍스트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취임 강의― 에서 발췌된 제사는 그 점에서 아주 명백하다. “나는 결정적으로 역사가 그 자체로 이성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과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들의 욕망에 복종한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_제3장 세계대전 동안의 두 지식인

1946년 초여름 이래로 서로 다르고 심지어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논리에 빠져든 사르트르와 아롱 사이에는 정치적 불신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들의 우정은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고, 이런 의심은 빠르게 우려할 만한 사고로 이어졌다. 예컨대 1946년 11월 8일에 있었던 『무덤 없는 주검』의 리허설에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고문당하는 장면에 불편해하던 쉬잔 아롱이 막간에 극장을 떠나게 되었다. 물론 자상한 남편인 아롱은 아내를 따라갔다. 이 일로 인해 사르트르는 기분이 상했고, 이해당사자인 쉬잔 아롱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일화가 정치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_제4장 대지진

사실 사르트르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무대에서 각광을 받으면서 빠르게 당대의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일종의 어찌해 볼 수 없는 죄를 벌하는 운명의 사자)이 되었고, 아롱은 무대 뒤에 있게 된다. 어떤 이들은 아롱을 ‘역사’의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 흐름을 거스르는 자로 여겼다. 또 어떤 이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를 같은 ‘역사’에 의해 항상 확인되는 예언을 하는 카산드라로 여기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역사’와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을 폭발시켜 버린 것은 아롱의 ‘역사’에 대한 해석이었다.
_제5장 냉전의 한복판에서

어쨌든 사르트르와 아롱에게도 이 시기는 중요했다. 사르트르에게는 분명히 반식민주의가 그의 가장 두드러진 참여였고, 게다가 사르트르라는 인간은 알제리라고 하는 기호 아래에서 정치에 눈을 뜬 새로운 세대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아롱으로 말하자면, 그는 알제리의 독립을 내세우면서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는 좌파 자체의 대부분의 지식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전쟁의 첫해부터 그런 해결책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_제6장 알제리에서 베트남까지

전 세계적으로 보도된 사르트르와 아롱이 함께 찍힌 두 장의 사진에 실제 의미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 그 당시에 두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상투적인 얘기도 있었다. 즉, 30년 된 불구대천의 적들이 갑작스럽게 그 당시에 주요 의제였던 ‘인권’이라는 주제의 대부 역할을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금색 카펫 위에서 이루어진 이런 종류의 만남을 통해 또한 지식인 사회에서 그때까지 대립 일색이었던 두 세계의 봉합이 굳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1979년 여름 초에 사르트르와 아롱과 더불어 이런 일은 실제로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_제7장 인상, 저무는 태양